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발언은 아주 함축적이었다. “우리한테는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과거 빌 클린턴 대통령과 북한 지도자의 정상 회담 계획이 직전에 무산된 적이 있었다. 선거 결과 후임자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가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후일 후임자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직접 전쟁을 한 국가 사이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것은 쉬운 일일 수 없다. 북·미 정상이 만난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성취다.
만남 자체가 변화의 시작
인공기와 성조기가 각각 여섯 깃발이 교대로 나부끼는 것을 배경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은 생경했다. 회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트럼프는 서명한 공동성명(Joint Statement) 문서를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다. 로이터 통신은 현장에서 그것을 찍은 사진을 확대해 곧바로 공동선언문 내용을 가장 먼저 세계에 타전했다고 한다.
회담의 핵심은 ‘비핵화’와 ‘북한 체제 보장’이다. 공동성명문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안전 보장(안전 담보, security guarantees)을 제공할 것을 확언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에 대한 확고부동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북한으로서는 명분과 체면을 살린 회담이었다. ‘북한의 비핵화’라 하지 않고, ‘한반도의 비핵화’라 표현한 점도 그렇다. 북한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불만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회담 상대방에게 항복을 선택하라고 할 수는 없다. 북한의 입장은 연합뉴스(2018.6.13)가 인용한 ‘조선신보’의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 “어느 일방의 굴종에 다른 일방이 보상을 주는 거래방식은 서로 핵무기를 겨누고 싸우는 두 나라 사이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완전하고(complete) 검증가능하고(verifiable) 불가역적인(irreversible) 비핵화(denuclearization)를 강조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회담 하루 전에도 이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공동성명 문서에는 V와 I에 관한 얘기가 없었다. 또 하나 지적되는 문제점은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완전하고 신속하게 이행’하기로 했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이지 않다.
사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의심만큼이나 미국의 ‘체제 보장’이란 것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CVID의 V, I를 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CVIG의 V, I를 정하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회담에 이어진 미국 기자회견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트럼프의 모습이 이를 깨닫게 했다. 구체성 결여는 구체적 내용에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구체적 조항이 자칫 향후 협상과 추진에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다는 점에서 공식 공개를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신뢰 구축, 시간이 문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호 신뢰 구축’이다.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할 새로운 북·미 관계의 수립은 정상회담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관계 개선을 더욱 진전시키고 문제의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실질적인 신뢰 구축에서 나온다.
“우리는 오늘 역사적인 이 만남에서 지난 과거를 덮고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문건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이런 자리를 위해서 노력해주신 트럼프 대통령께 사의를 표합니다.”
김정은의 발언은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한 출발점에 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독재와 인권 탄압을 이유로 불신할 것은 아니다. 우리 또한 적대 관계를 빌미로 독재와 인권 탄압이 이뤄졌던 과거를 생각하면, 적대 관계의 청산만큼 인권 개선에 효과적인 게 또 무엇이 있겠는가.
상호 신뢰 구축은 실질적인 행동과 조치를 주고받음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 신뢰를 쌓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한편, 시간의 제약이 있다. 김정은이든 트럼프든 시간이 많지 않다. 트럼프에게 제약이 되는 선거와 임기는 그대로 김정은에게도 적용된다. 폼페이오가 말한 2년 반은 신뢰의 유효기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뢰란 쌓기는 힘들어도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다시 기회를 얻기 힘들다. 김정은은 이 점을 충분히 알 것이다.
우리는 불신과 의심으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신뢰를 구축하고, 비핵화와 안전보장을 불가역적으로 만드는데, 우리가 실질적인 구실을 해야 한다. 평화와 번영과 안전을 구가하는 한반도를 누가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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