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하가쿠레, 칼시 필요없던 시대에 저술된 무사도 이야기.

도보사랑 2018. 12. 25. 18:09

하가쿠레(葉隠), 칼이 필요 없던 시대에 저술된 무사도(武士道)이야기

 

“무사도라고 하는 것은 죽음으로서 발견 된다”(武士道と云ふは死ぬ事と見つけたり)는 표현은

웬만한 일본인이면 다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무사도의 정수라고 불리는 하가쿠레(葉隠)가 원전인데 언뜻 살벌하게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가쿠레(葉隠)가 저술된 배경을 보면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시기의 무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읊은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무사도라고 하는 것은 죽음으로서 발견 된다”는 것도 기실 무슨 일을 하든 죽을 각오로 하라는 가르침으로도 해석된다.

 

하가쿠레는 야마모토죠쬬(山本常朝やまもと じょうちょう)라는 사가(佐賀)의 번사가 구술한 것을 타시로쯔라모토(田代陣基たしろ つらもと)라는 이가 받아 적어 책으로 남긴 것이다.

 

하가쿠레의 구술자인 야마모토죠쬬는 1659년에 태어났다. 토쿠가와이에야스가 천하 통일을 하게 된 결정적인 전투인 세키가하라전투(関ヶ原の戦い)가 1600년의 일로 에도막부가 열린지 50년이상 된 시기니 야마모토는 전국시대를 모르는 세대다.

 

에도초기의 내전인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도 한참 전에 평정된 터라 무사의 칼과 활은 무용지물이 됐다, 무사가 목숨을 걸고 싸울 전쟁은 더 이상 없었다. 평화가 계속되자 무사계급은 명목상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하이어아키의 정점에 있기는 했지만 사실은 상인계급인 죠닌(町人)의 시대였다. 무사는 자신들보다 신분이 아래인 죠닌에게 빚을 지기도 하고 가산도 없이 유랑하기 일쑤였다. “돈은 없지만 가오는 있다”는 의미의 속담인 “武士は食わねど高楊枝”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야마모토죠쬬는 부친이 70세였을 때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체가 허약해 20살까지 살 수나 있을까 주변에서 걱정했을 정도였다. 그는 사가번의 2대 번주인 나베시마미쯔시게(鍋島光茂)를 모셨다. 주로 책 심부름을 하는 비서역할을 했으니 문관에 속했다. 신체도 강건하지 않았고 문관이었으니 콤플렉스에서 오는 무사에 대한 막연한 선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야마모토가 모신 나베시마미쯔시게(鍋島光茂)는 주자학을 배운 명군이었다. 그는 주군이 사망하면 신하가 따라 순사(殉死)하는 오이바라(追腹おいばら)를 막부보다도 앞서 금지했다. 미쯔시게가 사망한 1700년에 야마모토는 42세였다. 그는 오이바라(追腹)금지령에 따라 그가 생각했던 무사로서의 명예로운 죽음(追腹おいばら)을 실행하지 못했다.

야마모토는 순사(殉死)대신 출가해 산중의 초당에 은거한다. 여기에 사가번에서 문서관리 일을 하다 면직된 20세 연하의 타시로쯔라모토(田代陣基たしろ つらもと)가 찾아와 매일 야마모토가 하는 이야기를 기록, 6년에 걸쳐 하가쿠레를 완성한 것이다.

 

하가쿠레(葉隠)라는 특이한 책 제목은 나중에 타시로가 붙인 것이다. 하가쿠레는 무사이며 승려 와카(和歌)작가였던 사이교(西行さいぎょう)법사의 산가집(山家集)에서 타시로가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寄残花恋(남은 꽃에 보내는 사랑)

葉隠れに散りとどまれる花のみぞ忍びし人に逢ふ心地する (나뭇잎의 그늘 속에 가려져 채 지지 않은채 남아있는 <사쿠라>꽃을 봤을 때, 늘 만나고 싶었던 사랑의 마음을 참아온 그대와 만난 듯 한 느낌이네) 山家集의 戀중에서

 

무사의 집안에서 잘 나가던 사이교법사는 23세 때 실연으로 인한 충격으로 출가해 사쿠라처럼 죽기를 원했고 73세에 사쿠라가 만개한 날에 타계했다.

 

초로의 나이 52세의 명목상 무사였던 야마모토의 구술을 책으로 엮은 타시로는 당시 33세였다, 타시로는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무사도가 나뭇잎 그늘 속에 가려진 채 지지 않고 남아있는 사쿠라처럼 야마모토에게 남아 있다고 느껴 하가쿠레라는 명칭을 선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을 남김으로서 무사도 정신이 영원히 죽지 않고 존속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가쿠레의 서두에는 “이 11권의 책은 (보고 난 뒤에는) 즉시 불속에 버릴 일이다. 후세에 비판을 받고 사악하게 해석돼 묘한 억측을 불러일으킬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야마모토의 유훈이었다. 원본은 불태워졌고 타시로가 옮겨 적은 사본만이 사가번에서 몰래 읽혀졌다. 이 책은 에도시대를 건너뛰고 메이지 시대인 1906년에야 비로서 활자화된다.

 

전시하의 일본에서 “무사도라고 하는 것은 죽음으로서 발견 된다”는 구절은 깨끗하게 죽은 것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흔히 해석돼 군국주의를 부추켰다고 평가되기 쉽다.

 

하지만 이 구절 다음에 등장하는 문구는 야마모토가 설파한 죽음이 실제 죽음이 아닌, 마음가짐임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毎朝毎夕、改めては死に死に、常住死身になりて居る時は、武道に自由を得、一生越度なく、家職を仕果すべきなり 葉隠聞書一2

(매일 아침저녁으로 거듭 죽고 또 죽어, 늘 죽은 몸이 될 때, 무사도에서 자유를 얻어 일생을 살 수있고, 가업을 응당 완수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常住死身’이란 표현은 ‘죽은 셈치고’란 의미다. 죽은 셈치고 어떤 일에 임하면 오히려 자유로움을 얻어 일도 더 잘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해에 입각한 생각보다는 자신을 버린, 즉 자신은 죽은 몸이라는 심경에서 나온 판단과 행동이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