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캉여우웨이

도보사랑 2018. 12. 25. 18:06

캉여우웨이(康有为), 변법사상가(變法思想家)인가 위군자(僞君子)인가?

 

청나라 말기 캉여우웨이(康有为)는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비슷한 입헌군주제를 주창하는 무술변법을 시도하다 위안스카이(袁世凯)의 밀고로 실패한다. 서태후에 의해 광서제는 유폐되고 캉여우웨이와 같이 무술변법을 주도하려 했던 탄스통(谭嗣同)등 이른바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는 처참하게 참살당한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일중합작드라마 창궁지묘(苍穹之昴そうきゅうのすばる)를 보면 일본에서 무사가 할복하면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카이샤쿠(介錯かいしゃく)가 있는 것을 신기해하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나오는데 서태후는 무술육군자들에게 고통을 더 주기 위해 날이 둔한 대장군도(大將軍刀)로 사형집행을 하는 바람에 탄스통은 28차례에 걸친 망나니의 칼질에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무술육군자가운데 가장 유명한 탄스통은 죽음 앞에서 당당했지만 정작 무술변법의 지도자격인 캉여우웨이는 영국선박편으로 일본에 도주한다. 그리고 딸 캉통삐(康同璧)를 홍콩으로 보내 자금을 모은다. 캉여우웨이는 해외에서 보황회(保皇會)란 조직을 만들어 입헌군주제가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선전해 해외화교들로부터 모금활동을 벌인다.

 

무술육군자의 희생을 팔며 애국심에 호소하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화교들의 기대와는 달리 거액의 돈으로 캉여우웨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캉여우웨이는 광서제가 밀지를 숨긴 관복의 허리띠 의대조(衣带诏)를 자신에게 하사했다면서 화교들의 자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두고 후세의 사가들은 캉여우웨이의 사기행각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캉여우웨이는 망명지인 일본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당시 내각총리였던 오쿠마시게노부는 그를 접견해 위로했다. 이후 일본정부는 캉여우웨이가 망명생활을 하는데 곤란하지 않도록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술변법에 실패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5명을 무술육군자라고 하는데 반해 캉여우웨이는 사이비군자(僞君子)라고도 불리운다. 그의 주장과 실제행동은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살생을 금한다고 하면서 매일 육식을 하는 등 호화호식을 했다. 그리고 여성해방과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면서 축첩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0대 소녀들을 계속 첩으로 들이면서 만년까지 모두 6명의 처첩(妻妾)을 두었다.

 

캉여우웨이는 43세때 정실부인인 장윈쭈(张云珠)를 두고 고향에서 18살된 량쑤이쟈오(梁随觉)를 첩으로 들인다. 그리고 량쑤이쟈오와 신혼이었을 때 베이징에서 100일천하로 끝난 무술변법이후 망명을 한다. 50세였던 1907년 캉여우웨이는 미국 캘리포니아 프레스노에서 구국을 하자는 강연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17세의 화교처녀 허짠리(何旃理)를 셋째 부인으로 들인다. 입헌군주제로 나라를 살리고 남녀평등으로 새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캉여우웨이의 연설에 4개국어를 하는 재원 허짠리가 반한 것이다. 그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캉여우웨이와 결혼해 통역비서역할도 한다.

 

1911년이 되자 캉여우웨이는 량계초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서 량계초의 저택인‘双涛园’에서 머무른다. 그러나 부인들끼리 사이가 않좋아 이듬해 캉여우웨이와 허짠리는 코베의 스마(須磨)에 있는 일본식 별장 분예원(奋豫园)으로 이사한다. 여기서 셋째부인인 허짠리(何旃理)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이때 캉여우웨이는 16살된 이찌오카쯔루코(市岡鶴子)라는 소녀를 하녀로 고용한다.

 

하녀로 고용된 이치오카쯔루코는 박식하고 견문이 넓은 캉여우웨이를 방문라는 인사들이 매일 인산인해를 이루자 어느새 그를 존경하고 연정을 품게 된다. 캉여우웨이와 쯔루코는 여러번 손까지 잡고 데이트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분예원에서 몇 년동안 지낸 캉여우웨이는 결국 상하이로 떠난다. 캉여우웨이는 상하이에서 쯔루코에게 보고 싶으니 상하이를 방문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쓰게 되고 쯔루코는 부모를 설득해 상하이로 건너간다. 결국 56세였던 캉여우웨이는 쯔루코를 유혹해 네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셋째 부인인 재미화교출신의 허잔리는 상하이에서 1914년 성홍렬에 걸려 24세에 사망하게 되는데 캉여우웨이는 그녀의 빈자리로 인한 공허함을 달랜다면서 5번째 부인으로 랴오띵쩡(廖定征)이란 처녀와 결혼한다. 이때 캉여우웨이는 58세였다.

 

캉여우웨이의 여성편력은 계속된다. 62세였던 1922년 그는 서호 유람을 하다 뱃사람의 딸인 19세의 장광(張光)에게 반한다. 서시라도 발견한 것처럼 흥분한 캉여우웨이는 사람까지 보내 그녀의 부친을 설득해 6번째 여인으로 들인다. 캉여우웨이는 상하이에서 크게 혼례를 올리지만 그동안 인내해왔던 여러 부인들과 자녀들은 그의 결혼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는 사이 캉여우웨이가 68세였던 1925년 일본인 출신의 네 번째 부인 쯔루코가 결혼 12년만에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금슬이 좋았던 부부였는데 왜 늦게서야 임신을 했는지, 그리고 캉유웨이가 고령인데 임신이 가능이나 한지 여러 소문이 돌았다. 끝내는 쯔루코가 캉여우웨이의 아들인 캉통쩐(康同箴)과 사통했다는 이야기까지 퍼지면서 집안에 풍파가 일어났다.

 

1926년 캉여우웨이는 쯔루코를 일본에 돌려보내고 그녀는 일본에서 여아를 출산해 료코(凌子りょうこ)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하녀로 나이차이가 많았던 캉여우웨이와 국적을 뛰어넘어 결혼한 쯔루코의 운명을 비참했다. 나중에 백발이 된 70여세의 쯔루코는 우울증에 빠져 일본에서 캉여우웨이와 살았던 분예원(奋豫园)근처 교외에서 철로에 누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캉여우웨이는 1927년 칭다오에서 갑자기 사망한다. 6번째 부인인 장광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돼 항저우의 농촌에 은거한다. 그녀에게 남겨진 유산은 명필가이며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던 캉여우웨이의 서예작품과 그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를 도둑맞은 그녀는 충격에 쓰러져 병을 얻게 되고 결국 불귀의 객이된다.

 

청나라 말기에 무술변법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대학자로만 알려진 캉여우웨이의 이 같은 여성편력은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어로 가족들의 단체 기념사진을 취앤쟈푸(全家福)라고 하는데, 캉여우웨이의 취앤쟈푸는 그가 僞君子라는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