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이 존경했고 스탈린이 미워했던 ‘Humanist General’ 히구치키이치로(樋口季一郎)
히구치키이치로(樋口季一郎)는 1938년 만주 하얼빈의 특무기관장이었다. 당시 나치의 박해가 극에 달한 유럽에서 18명의 유대인이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만주국경의 소련령 오뜨뽀르(Отпор 현재의 자바이깔스크 Забайкальск)역에 몰려든다. 이들은 안전지대인 상하이 조계로 가고자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경유지인 만주국에 입국해야 했다.
당시 만주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고 일본은 군사동맹국인 독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대인들은 추위와 배고픔 속에 소련령 오뜨뽀르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이때 하얼빈의 극동 유대인 협회 대표인 아브라함 카우프만이 히구치에게 탄원했다. 히구치는 만주국에 유대인들의 입국허가를 지시하고 만주철도총재였던 마쯔오카요스케(松岡洋右)에게 특별열차 편성을 요청한다.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을 안전지대인 상하이조계까지 갈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1938년부터 40년까지 모두 4000명의 유대인들이 이렇게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이는 역사에 ‘히구치 루트’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유대인에 대한 이 같은 인도주의적 결단이 있기 세달전 히구치는 하얼빈 유대인들의 제1회 극동유대인 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오늘날 세계의 안 보이는 구석에서 포그롬(Pogrom)이 행해져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추방이 자행되는 것을 목도하게 돼 진심으로 슬프다. 유대인들을 추방하기에 앞서 그들이 갈 토지와 조국을 줘야 한다”고 연설해 격찬을 받은 바 있다.
히구치의 결단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이나 만주국이 독일의 속국이 아니며, 법치국가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면서 소신을 행동에 옮겼다. 일본과 방공협정(防共協定)을 맺고 있던 나치 독일은 격분했다. 히틀러는 리펜트로프 외상과 오토 주일대사를 통해 공식 항의했다. 히구치는 도조히데키에게 히틀러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주장했다. 도조히데키는 결국 히구치의 주장을 납득하고 불문에 붙였다.
하얼빈특무기관장을 마친 히구치는 육군정보를 다루는 참모본부 제2부장과 가나자와 9사단장을 지낸 뒤 1943년 삿포로의 북부군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이 시절 압도적인 미군의 포위하에서 옥쇄를 목전에 둔 키스카(Kiska)섬과 아투(Attu)섬(현재는 미 알라스카령)의 일본군수비대 6천명을 비밀리에 철수 시키는 기적을 이룬다. 아투섬과 키스카섬은 미드웨이와 양동작전을 하자는 해군의 요청으로 점련한 것인데 해군은 1942년 미드웨이에서 대패하게 되고 미군은 알류산 열도에서 본격적인 반격을 하게 된다.
히구치는 해군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해군은 연료부족을 이유로 들어 이를 방관하게 된다. 초기에 대본영은 옥쇄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히구치는 아투섬의 장병을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면서 대본영을 설득해 철수작전을 단행한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 히구치는 대본영의 허가가 나오기도 전에 작전을 벌인다. 생명부터 구해야 한다는 판단에 배에 싣는데 시간이 걸리는 무기를 과감하게 버리고 안개를 틈타 기적적으로 인명피해가 없는 철수작전을 성공시킨다.
1945년에는 소련이 중립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참전한데 이어 종전후에도 침공을 계속하자 단호한 반격을 가했다. 대본영은 8월 16일 전투행위 중단명령에 이어 8월 18일에는 자위목적의 전투도 중단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부한 것이다. 히구치는 쿠릴열도 최북단의 슘슈도(占守島しゅむしゅとう)에서도 소련군과 격렬하게 싸웠다. 당시 소련은 홋카이도를 분할 점령한다는 야욕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막는데는 히구치의 공로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히구치는 독일어도 능통했지만 육군대학교에서는 러시아어를 배운다. 당시 일본육군의 주적은 러시아였고 그가 육군대학에 재학했을 때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게 돼 그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히구치는 폴란드에서 무관을 하면서 사교댄스도 능숙해 상당한 인기를 끈 것으로 전해지며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압박을 받던 폴란드군부와 함께 소련에 대한 정보수집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나중에 히구치가 만주 하얼빈에서 특무기관장을 하면서 유대인을 구하게 된 데는 폴란드에 있을 때 그루지야를 여행하면서 겪었던 일화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그루지아에 여행객으로 머무를 때 현지의 유대인 노인이 말을 걸어왔고 그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집에 초대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유대인이 전세계에서 억압받고 있으며 언젠가 일본이 유대인을 구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노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유색인종이 백인을 이긴 일로전쟁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히구치는 러시아계 유대인의 집에 머무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스탈린은 독단으로 소련군과 싸우며 홋카이도 상륙을 저지한 히구치를 전범으로 지명하고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고 토쿄전범재판에도 회부하지 않았다. 만주에서 유대인을 구출한데 대해 뉴욕에 본부를 둔 세계 유대협회가 미 국방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그를 구명한 것이었다.
1948년 건국한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아인슈타인등 유대민족에 공헌한 이들의 이름을 기록한 골든북이 있는데 히구치도 여기에 “The Great Humanist General Higuchi”(위대한 인도주의자 제너럴 히구치)”라 기록돼 있다.
히구치는 전후 여러 민간 기업에서 초빙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은둔하며 지내다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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