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신륵사에서 만나본 나옹선사..(2019. 4. 29, 월)
고려 공민왕의 왕사, 나옹은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했다. 국사였던 양주 회암사를 떠나 밀양 영원사로 가라는 우왕의 명에따라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다 지친 몸을 쉬고자 7일간 이곳 신륵사에서 머물다 열반했다. 다비식은 신륵사 경내 강가 암반위 좁은 공간에서 거행되었다. 넓고 깊게 흐르는 남한강이라 마치 갠지스강가에서 다비식이 진행된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옹의 스승이 인도승인 지공이라 더욱더 그런 느낌을 받는다. 다비가 이루어졌던 장소에는 작은 삼층석탑과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가 세워졌다. 강월헌은 나옹이 살던 집의 당호(堂號)이다.
나옹이 양주 회암사를 떠나라는 명을 받은것은 회암사 중수에 국고를 쏟아 부은것을 문제 삼았다고하지만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른 일종의 유배령이었다는것이 정설이다. 우왕이 왜 나이(당시 57세)도 많은 나옹을 멀리 떠나도록 명령했을까...
나옹이 살던 여말 시대는 불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피폐된 상황이었다. 실천하는 선으로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면서 불교를 중흥시키고, 사회적으로 중생들의 권익을 위해 보살행을 실천하면서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한것이 권문세족들로부터 반발을 산것은 아니였을까. 그의 불교계의 정화와 통합, 현실참여 정신은 이후 조선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을 보면서 감히 상상해보는것이다.
다비후 수습된 사리 일부는 대웅전 뒤 언덕위 남한강을 조망하는 소나무숲 공간에 인도양식의 부도형 석조 사리탑에 석등, 비석과함께 봉안되었다. 신륵사를 찾으면 고려대장경 인쇄초판물이 보관된 경위와 시주한 사람들 이름 모두를 기록한 대장경기비(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5년전인 1383년에 세워졌는데 이성계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연화문양이 아름다운 다층전탑, 3화상(지공, 나옹, 무학)진영이 그려져있는 조사당은 반드시 둘러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세종과 효종의 능,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는 이곳 여주, 조선역사가 전부인것 같지만 신륵사를 마주하면 짙은 고려역사를 만난다.
나옹선사는 시를 읊었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드높은 저 하늘은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어지러운 세상에서 한번쯤은 이곳 신륵사에서 나옹선사를 만나보면 좋겠다. 어떻게 하는것이 바람직한 현실참여인지, 그리고 복잡한 세상사를 벗어날수 있는지 지혜를 구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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