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 전등사(2023.1. 27, 금)
수자기(帥字旗)는 1871년 신미양요때 강화도 광성보를 지키던 어재연 장군의 대장기다. 미국은 광성보를 함락하고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갔다.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수자기는 당시 미군들이 찍었던 사진과함께 2007년 136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광성보 포진지, 바닥에 드러난 날카로운 바위, 흑갈색 염하수는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말해주는것 같다. 전투결과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350여명의 조선군 모두가 전사하였고 미군은 전사 3명, 부상자 1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나고 조선의 관리가 20여명의 포로를 인수하기위해 미 콜로라드함에 올랐을때 함상에 펄럭이든 수자기를 끌어내린 미군은 퍼비스 일병과 브라운 상병이다. 내린 수자기 옆에 그 두 병사가 서있다. 앞서 병인년 1866년엔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군과 격돌했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양이(鎖國攘夷) 대외정책이 빚은 결과들이다.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에 힘을 뻗치고 있었다. 영국은 청나라와의 아편 전쟁에서 이겨 홍콩의 지배권을 가졌고, 러시아는 1860년에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어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고, 미국은 1854년 강제로 일본을 개방시켰다.
반면에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묘가 독일/프랑스인에의해 파헤쳐졌음에도 통상교섭에 강경하게 반대했다. 오히려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이러한 정책을 더욱 공고히하고 공식화했다. 척화비의 내용은 이러하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기 위해,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자손만대에까지 경계하기위해!
이 한마디는 대원군의 국제정세를 보는 눈과 시국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민비세력과의 권력다툼, 계속 집권을위한 욕심으로 볼수도 있으나 풍전등화같은 나라의 운명을 생각해볼때 대원군의 집권은 시대의 불행, 조선의 불행이었다고 보는것은 나의 지나친 시각일까.
왕명, 나라 정책에 충실히 따른 상투 틀고 흰옷입은 조선군의 시체들이 널브러진 손돌목 돈대(어재연 장군도 이곳에서 전사했다)와 이름도 없이 전사한 무명용사들을 7개의 묘에 합장한 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에 서니 더욱 더 그러한 생각이 든다.
돌아오는 길에 아직 눈이 녹지않은 전등사에 갔다. 이규보 묘와 철종외가도 함께 들러볼까 하다가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정족산 전등사는 단군할아버지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마니산과 가까운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500년의 역사, 조선왕조실록 등 왕실의 중요한 서적들을 보관했던 사고(史庫)가 있었던 곳이다.1866년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장군과 이름 모르는 조선의 백성들이 이 사고를 지켰다.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숨은 공헌자들은 무명의 용사들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대웅전 불상, 그 옆의 낡은 벽과 기둥을 보면 여기저기 먹으로 써놓은 글씨들이 눈에 띈다. 이는 관광객들의 낙서가 아니라 병인양요때 강화를 지키던 병사들이 남긴 기도문과 이름들이다.
정족산사고의 운명은 조선의 국운과 함께 스러졌지만(1910년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사고에서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를 지키고 역사를 이어온 주체는 백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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