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산행 #7(2023. 4. 2, 일)
오늘은 한양 마지막 산행으로 관악산(629m)으로 가는 날. 아차산과 청계산은 학오름 친구들과 여러 번 올랐기에 가지않기로 했다.
버스정류장 건너 편에 수소전기로 움직이는 버스가 정차해 있다. 지금은 4차 혁명, 기술혁신의 시대. 내연기관의 차는 멀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오염에 찌든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근데 우리 인간의 주검을 AI 로봇이 처리하는 순간도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왠지 무섭고 서글퍼진다. 버스 안내양이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를 손바닥으로 치면서 "오라이~"를 외치던 매연 내뿜는 그 시절 버스가 그립기도 하다. 편안하고 안락한 문명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도시를 떠나 자연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전철안에서 정채봉의 글 한 편을 읽어본다.
사랑을 위하여 /정채봉
사랑에도
암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이다
사랑에도
항암제가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 '
남녀간의 사랑에대한 노래인 것 같다. 의심(암균)과 믿음(항암제) 사이에 경계가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믿음을 갖고, 믿으면서도 의심하는 사랑이 아닐까. 암균과 항암제간의 치열한 싸움도 있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언제나 부족한 인간, 만 가지의 내면 세계를 가진 인간은 뜻밖의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소유하고 싶고 집착하는 사랑으로 인해, 아니면 놓아 줄 수 밖에 없는 사랑으로 인해 이별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은 무조건의 사랑, 아파도 웃을 수 있는 일방의 사랑 일지도 모른다. 마치 자연을 대하는 사랑처럼.. 오늘의 관악산 등정에서 만나고 싶은 사랑이다.
과천 정부청사에서 산행의 들머리인 과천향교로 이르는 길엔 개나리, 벚꽃이 만개하였고, 목련은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잔인하면서도 화려한 사월은 언제나 변함없이 오고 가지만 해가 지날수록 내 마음의 풍경은 변해가기만 한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찾아 드는 아쉬움, 초조감, 공허감 때문 일것이다.
먼 산을 응시하면서 처마 끝에 걸려 있는 연주암의 풍경이 좋아 보이고 "명예와 지위, 재물은 부질없는 것"이라는 독경소리도 귓전을 맴돈다. 산행을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아 곱씹으며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에 올랐다.
관악산은 경기 5악중 하나다. 원래 화산(火山)이라 하여 "조선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화기(火氣)를 끄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해태(海駝)를 만들어 세우고, 또 관악산의 중턱에 물동이를 묻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보다 관악산 정상에 서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깊게 바라보고 싶었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태백의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서해로 약 520Km를 유유히 흘러온 한강..
내가 걸었던 한수(漢水) 이북의 산들과 오늘의 한수 이남의 관악산은 한 몸이다. 한양은 그러한 터로서 인간의 삶과 함께한 도도한 역사의 한 공간이다. 조선이 도읍한지 630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외침과 나라 잃은 질곡의 시대도 있었지만 한강의 기적을 이룬 영광의 시대가 더 많았다. 중앙을 관통하는 漢水가 모든 산을 아우르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눈부시게 발전한 수도 서울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한양 배움의 길을 나선 이래 마지막 관악산에 올라서야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됨에 감사하다. 한양의 산들이 나에게 준 귀중한 선물이다. 의심과 믿음의 경계를 지우고 함께 흘러가라는 한강의 교훈이다.
관악산 정상에 오른 수 많은 산행객들도 그러한 느낌을 가지면 좋겠다. 산과 함께 살아가는 민족, 특히 한양의 산들을 사랑하는 한양의 백성들이기에 능히 그럴 것이다.
*과천향교~깔딱고개~연주암~연주대(정상)~관악문(바위)~사당역으로 내려옴. 19,800보
*한양 배움의 길
1. 연주대
해발 629m 높이로 깍아지른 듯한 벼랑위에 있는 대(臺)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대사가 관악사를 창건하고 연주봉에 암자를 세웠기에 의상대라 하였으나 지금은 연주대라 불린다. 세종대왕의 형들인 양녕, 효령대군이 왕위 계승에서 밀려 나자 이곳으로 입산하여 경복궁을 바라보며 국운을 기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3형제(양녕, 효령, 충녕)의 우애가 조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부왕 태종의 피로 얼룩진 형제간 칼부림의 결과일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쁜 것을 물려줄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