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여주 풍경
여강, 억새, 황돛단배, 영월루, 세종대왕릉(英陵), 장영실의 과학산물, 초승달, 그리고 조선왕릉문화제 공연 리허설..
음력 3일 경에 뜨는 오른쪽이 둥근 눈썹 모양의 초승달은 소헌왕후의 예쁜 눈썹. 리허설에서 장영실을 때리는 곤장은 세종의 애민 정신.
왕보다 2살 연상의 소헌왕후는 남편인 세종을 사랑하여 많은 왕자, 공주들(8남 2녀)을 낳았고 4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살아 생전엔 왕후의 부친 영의정 심온을 비롯하여 청송 심씨 가문은 시아버지 태종에게 죄도 없이 숙청당했다. 남편 세종의 상심은 컸을 것이다. 그러나 부왕의 뜻을 알았던 영민한 세자였기에 인내하며 공부하여 후세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왕이 되었다.
소헌왕후는 죽어서 시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 서쪽편에 묻혔다. 4년 뒤 세종도 승하하여 소헌왕후와 함께 18년 동안이나 부왕인 태종 능 곁에 있었다.
소헌왕후는 죽어서도 시아버지 태종이 무서웠을까? 당대의 풍수가들은 세종 능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는 이를 받아들여 죽기전 유언을 남겨 뒤를 이은 아들 예종 1년(1469년)에 여주 길지(吉地)인 이 자리로 소헌왕후와 합장하여 이장되었다. 능의 이름은 변함없이 영릉(英陵)으로 명명했다. 이전 세종과 소헌왕후가 묻혔던 자리엔 또 몇 백년이 지나 조선 23대 왕 순조(정조의 아들)와 그의 비(妃)가 파주 교하에서 이장되어 묻혔다. 바로 인릉이다. 한 장소를 두고 역사는 반복되는가 보다. 지금 서울의 남쪽 내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태종의 능과 함께 헌인릉으로 부르고 있다.
여주 英陵, 이곳은 누가보아도 아늑하고 솔향이 짙으며 깊숙한 골짜기에서 숯을 구워내던 백성들의 삶터 같은 곳 같다.
세종이 이곳에 이장된 이후 200여 년이 지나 청(淸)에서 볼모 생활을 했었고 왕이 된 이후엔 북벌을 계획했던 효종도 죽어 이곳 이웃 능선에 묻혔다. 영릉(寧陵)으로 불렀다. 두 왕릉이 자리잡은 여주의 위상이 높아졌을 것이고, 능선과 능선 사이엔 두 왕릉을 이어주는 약 700m 거리의 왕의 숲길도 생겼다.
뜻을 이룬 왕과 뜻을 이루지 못한 왕이 함께 누워 있음에도 이어주는 숲길이 있고, 해마다 조선왕릉문화 축제가 열리고 있음은 지금도 역사는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두 왕릉 너머엔 신륵사와 영월루를 마주하며 흐르는 여강이 있다. 여강이란 '여주(驪州)를 지나는 남한강'이란 뜻이지만 앞서 달리는 말(馬)을 제외하면 곱고 아름다운 강, 麗江이다.
여강의 물은 북쪽으로 흘러 이름도 고운 두물머리에서 북에서 내려온 물과 합수하여 조선의 심장, 한양을 향해 서쪽으로 흘러간다.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기 이전부터 유유히 흘러왔다. 강을 바라보면 그 흐름이 아름답고 선(善)하다는 느낌을 갖게된다. 언젠가 목적지 바다에 이르지만 목적지를 생각지않고 순간순간 굽이굽이 흘러가는 그 곡선이 부드럽고 귀함을 느낀다.
왕이 누운 자리는 그 이전 옛날 능서면의 깊은 골을 찾아 밭을 일구고 숯을 구워 살았던 백성들의 삶터가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며칠전 읽었던 책에 등장한 삿갓 김병연의 가족들이 멸문지화를 피해 숨어들어 살았던 한 곳도 이곳과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 때문일까.
인간의 삶에서 貴하고 賤하고, 가졌고 못가졌고, 누리고 못누리고, 뜻을 이루고 못이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여기 누워 있는 그러한 두 왕의 넋을 실어 굽이굽이 흘러가는 저 여강처럼 유유히 살아가는 모습이 소중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월 오후 반나절 여주에서 보고 만난 작은 감흥..
20231022, Song s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