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
전쟁에서 제일 큰 피해자는 민간인들이다. 특히 아무 저항력을 가지지못한 여성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는다.
과거 군대 지휘관들은 전쟁에서 승리의 필수요건인 장병들의 사기진작과 병사들의 성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에도 지휘력을 집중시켰다. 신속한 기동과 물자의 현지 조달을 중요시한 나폴레옹도 결정적인 전투를 앞두고 지친 병사들에게 '목표를 점령하면 재물과 여자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다'며 병사들의 전투의지를 고취시켰다.
원거리에서 첨단무기로 단시간내 승부를 결정짓는 현대와 미래 전쟁에선 이러한 현상은 없을 것이며 일어나서도 안되겠지만
지난 전쟁의 기록엔 '어느 전쟁에서든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점령지의 민간인들에 대한 약탈과 겁탈은 장병들에게 지급하는 보상의 주요 수단이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오늘 읽은 책의 한 부분. 전장에서 운용되어온 군 공창(Military brothel)에 관한 내용을 참고 소개.
- 군 공창(Military brothel) -
* '물로 씌어진 이름' 제4권 164~170 페이지
서양에서 군 공창이 공식적으로 도입된 계기는 십자군 전쟁이었다. 12세기 말엽 제3차 십자군에선 영국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기독교군을 이끌면서 회교군과 싸웠다. 그때 필리프 2세는 십자군들의 강간과 계간이 너무 심한 것에 충격을 받아 프랑스에서 매춘녀들을 모집해서 배로 실어 오도록 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에서 프랑스군은 유럽국가들 가운데 맨 먼저 군 공창을 공식적으로 도입했다. '종군 군공창'이라 불린 이 제도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공산주의 월맹 군대에 포위된 '디엔 비엔 푸' 요새에도 시행되어 알제리와 베트남 출신 매춘부들이 공수되었다. 그 뒤 '야전 군 공창'은 해외 외인부대들에 설치되었다가 2003년에 폐지되었다.
동양에서 이 문제에 기능적으로 접근한 것은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한 일본이었다. 1932년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 사령부는 상해에 군 공창을 최초로 설치했다. 주도자는 당시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 대좌였다. 이후 해외 팽창을 추구하면서 크게 증강한 일본군을 위해 설치된 소위 '군 위안소'로 불린 군 공창도 커졌다.
가장 집단적이고 비인도적인 군 공창을 운용한 나라는 2차세계대전 당시 모든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일제점거 형식으로 점령지의 여인들(대부분 유대인)을 강제 납치, 징집하여 성노예들로 만든 독일이었다. 군 공창과 수용소 공창에서 성노예들로 살아야했던 여인들은 적어도 3만 4천명이 넘었는데 모두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일제점거는 도덕과 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행태로서 히틀러의 인종 구분 의식에 기반한 범국가적 행위였다는 점에서 독일이 유난히 사악하고 파괴적이었다.
The tragic war history. Sending women into battlefield as sexual victims is a kind of State violence & deadly crime.
20240108, Song s y
* 첫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