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우남의 위대성
1. 조국의 미래를 위해 우남이 마련해 놓은 가장 위대한 유산 '한미 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번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에 의해 조인
"본 조약의 당사국들은 모든 국민과 모든 정부와 평화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희망을 재확인하며... 당사국 중 어느 일국이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가지지 않도록 외부로부터 무력 공격에 대하여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통의 결의를..." (전문)
"상호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용한다." (제4조)
2. 경제발전의 바탕을 마련
군사적 안보에이어 경제협력에 관한 협상은 국무총리 백두진과 미국 경제조정관 우드 사이에 진행되어 1953년 12월 14일 '경제재건 및 재정 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회 협약'이 조인되었다. 이 협약을 바탕으로 미국의 경제 원조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다. 한국경제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 나온 중요한 성취들
- 한국산업은행 발족(1954.4월)
- 5개년 부흥계획 발표(1955.7월)
- 증권시장 개장(1955.8월)
- 충주비료공장 기공(1955.10월)
- 한미 원자력협정 조인(1956.2월)
- 한국원자력연구소 설립(1959.2월)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한 나라들은 정치지도자의 청렴이 경제발전의 결정적 요소가 된다. 우남은 보기 드물게 청렴한 지도자로서 직업혁명가답게 가난하게 살았고 긴 일생에서 단 한 번도 금전적 추문에 휩싸인 적이 없었다. 한 때 미 군정청에 부탁해서 마포 한강변의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여름 별장을 숙소로 얻어썼을 때 오래 비워둔 그 집이 무척 허름하고 문짝이 제대로 맞지 않자, 우남은 미국에서 가지고 온 연장통에서 대패를 꺼내서 수선했다. 젊었을 적에 몬테나주에서 목수 일을 해서 그는 연장을 잘 다루었다. 그러나 수도도 나오지 않는 여름 별장에서 겨울을 나느라 우남과 비서들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3. 사심없는 인재 기용
어느 지도자나 자신이 속하고 지지하는 집단에 의지해야한다는 현실과 사회 전체에서 인재를 뽑아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고뇌한다.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중용하는 것은 가장 큰 부패다. 기호파(윤치호, 이상재 등 경기도, 충청도 출신)에 속했던 우남이 그의 정치적 숙적이었던 서북파(안창호, 이광수, 조병옥, 이윤영 등 평안도, 황해도 북부 출신)를 대거 기용하고, 공산주의자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명한 것은 더욱 극적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조봉암은 일찍 귀국해서 전향한 뒤 조선총독부에 협력한 인물이어서 평판이 좋지않았다. 상해 시절의 행적은 더욱 문제적이어서, 우남은 그 일에 관해서 이범석 총리의 의견을 들었다. 그래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힘든 농지개혁의 적임자라 판단이 서자 우남은 그를 과감히 기용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근본 출발점이 되었던 농지개혁은 우남의 사심없고 공정한 인재 기용에 기인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했는데, 그런 나라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자유주의에 대한 믿음과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우남처럼 깊었던 사람은 없었다. 1941년 11월 중경임시정부가 공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이념과 정책이 사회주의적(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 천명) 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남의 존재는 대한민국에 얼마나 큰 행운이었나.
이 밖에도 우남의 애국심, 정치 신념, 그의 사상을 일일이 열거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 위 내용은 대부분 책 '물로 씌어진 이름'에서 인용
20240211, Song s y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비 (1) | 2024.02.19 |
---|---|
우남의 마지막 기도 (0) | 2024.02.19 |
다큐영화 '건국전쟁'을 보고 (1) | 2024.02.07 |
우남 이승만 (1) | 2024.02.05 |
이어진 인연 (2) | 2024.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