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서원의 꿈
여주 강천면 가장 긴 골길에 위치한 여백서원(如白書院)은 한평생 괴테를 공부하신 전영애 교수가 지은 서원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은 아니지만 싱그러우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숲이 서원을 감싸고 있다. 약 3,200여 평의 서원엔 여백재(如白齋), 시원(詩苑), 시정(詩亭), 예정(藝亭)이 자리잡고 있다. 작년엔 건너편 숲속에 '젊은 괴테의 집'도 세워졌다.
며칠 전 이 괴테할머니 전영애 교수의 파우스트 강의 영상을 본 뒤 찾아보고 싶었던 여백서원. 일찍부터 독일로 유학, 한평생 괴테를 연구한 학자의 삶과 노년 꿈은 어떤 모습일까, 고향도 아닌 이곳에 연구소가 아닌 서원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1951년에 태어난 인문학자 전영애 교수의 고향은 서원이 많은 선비의 고장, 영주다. 서양에서 공부하였지만 학자의 본향은 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향의 서원이었나..
여백재와 젊은 괴테의 집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개방되고 강의가 진행된다. 쌀과 도자기의 고장 여주가 품고 있는 영릉, 신륵사를 지나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하니 입구에 씌어진 '맑은 사람을 위하여, 후학을 위하여, 詩를 위하여'란 글이 인상적이다. 책이 가득찬 여백재 한 구석에 서서 머리 희끗희끗한 괴테할머니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본다.
먼저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말씀하신다. 여백재는 남은 공간 여백(餘白)이 아닌 아버지의 호(號), 여백(如白)을 따서 이름지었다고. 92세에 사망한 아버지는 90세까지 매년 에베르스트를 등정(85세 땐 고령자로서 세계에서 두번 째로 킬리만자로를 등정했다는 신문 기사가 있다)하고 산행일지를 꼼꼼히 기록하여 책까지 발간하셨고, 문중의 문집도 피눈물로써 번역하고 썼다고 한다. 어머니는 14세 결혼시 혼수물로 가져온 긴 두루마리 글(어머니가 12세 때 필사한 글로써 여백재 상량에 부착되어 있다)과 옛 소설을 필사하여 책으로 간직할 정도로 배움과 기록 정신이 대단하셨다고.
부모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 받은 인문학자는 서원을 지은 이유를 설명한다. "우린 아까운 것을 너무 많이 버렸다. 서원이 그러하다. 내용이 있는 우리 시대 서원을 만들고 싶었다. 허겁지겁 숨가쁘게 살아가는 삶에서 숨을 돌리며 살아갔음 좋겠다. 가끔 쉬면서 옷깃을 여민 후 자기 자리에 돌아가선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잘 살면 좋겠다"고. 글을 쓰는 공간을 갖고자 250만 원짜리 폐옥을 마련한 후 지금의 여백서원 땅을 마련하기까지 과정도 설명한다. 이 서원은 '나무 고아원'이라고 말한다. 버려진 나무를 구해 와서 정원과 숲을 가꾸고, 자신은 이 서원을 관리하는 '3인분 노비'(옛날 서원엔 몇 명의 노비가 딸려 있었는데 자신은 3인분 몫을 하는 노비)라고 자칭한다. 약 30분 정도 여백서원을 소개하는 말씀 내용은 학자의 지난 삶과 삶에 대한 철학이 묻어있기에 그 내용을 전부 영상으로 담았다.
책의 집인 여백재 내부 풍경을 담고 시정(詩亭)쪽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시정의 입구엔 짧고 의미심장한 詩로 유명한 '시인 라이너 쿤체의 뜰'이란 표지석이 있다. 평생을 시와 글로 보내온 독일문학 교수의 이 작은 공간은 서원이 있기 훨씬 전에 지어진 사방 2.1m 정도의 아주 작은 방이다. 방안에는 높이가 낮은 앉은뱅이 책상 하나가 놓여 있다. 시인의 절제와 여백의 미를 보는 듯 하다.
시정 옆엔 낮은 동산으로 향하는 산책길, 괴테 길이 이어진다. 길 중간 중간 놓여져있는 대리석판에서 괴테의 글들을 만난다. 대부분 노년의 괴테가 읊은 주옥같은 시구절이다. 이 몇 개의 대리석 글을 읽으면 굳이 어렵고 이해가 힘든 파우스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떠한 인간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모든 큰 노력에 끈기 더하라'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도 바르다'
'바르게 행하려는 자, 늘 가까이 뜻에, 가슴에 진정한 사랑을 품어라'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대가 옳지 않은 것이고 감사할 줄 안다면, 그대 형편이 좋지 않은 것'
.............
들길을 건너 숲속에 세워진 '젊은 괴테의 집'으로 간다. 이곳은 전영애 교수의 더욱 짙은 꿈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괴테가 바이마르에서 자신의 뜻을 세웠던 집을 기념하고자 이곳에 1차 독일풍의 2층집을 세웠는데 1층엔 괴테의 책들과 번역본들, 헤르만 헤세, 카프카에 이르기까지 테마별로 다양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엔 벽면 스크린 강의실이 중앙에 있고, 양쪽 공간에 괴테 아버지의 방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던 유년 시절의 괴테 방으로 꾸며놓았다. 올해안으로 괴테가 바이마르에서 뜻을 세우며 살았던 집을 작은 규모로 짓고(전영애 교수가 직접 그린 설계도가 전시되어 있다), 앞뒤 정원, 산책길들도 아름답게 꾸밀 것이라 한다.
이곳에도 괴테의 삶과 문학이 곳곳에 씌어져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한 방황한다'
'젊은 시절에 소망한 것은 노년에 풍성하게 이루어진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어야 할 것 - 뿌리와 날개'
'내가 받은 유산, 얼마나 찬란하고 넓디 넓은지. 시간이 나의 소유, 나의 경작지는 시간'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다'
파우스트(Faust)는 대문호 괴테가 장장 60년을 두고 써내려간 인간 파우스트의 장대한 드라마다. 길고 어려운 이 파우스트를 난 읽어보지 못하고 영상 강의만 들었다.
노년의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하는 내용. 쾌락과 세속적인 삶, 영혼의 구제 문제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말해준다.
전영애 교수는 스크린에 결론적인 글을 썼다.
Why Goethe?
- 뜻을 가지면 사람이 얼마나 클수 있나
- 그런 큰 사람은 자기를 어떻게 키웠나
괴테연구에 온 삶을 바친 인문학자 전영애 교수는 지금도 꿈꾸고 있다. 괴테처럼 살고자한다. 여기 여주 강촌면 긴골에 괴테마을을 만드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꿈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손대지 못한 괴테 전집 전권을 앞으로 5~10년 내에 번역하고자 한다. 지금 절반 정도 작업을 마쳤다. 중국에선 이 사업에 총 120명이 달라붙었다.
여백서원에서 만난 한 인간의 꿈과 의지, 귀한 인생은 쉬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https://youtu.be/u8vriEKrgnc?si=RMQKRhcAEB5L06Mw
20240331, Song s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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