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
'詩가 먼저인지, 그림이 먼저인지?' 우리가 어떤 감흥이 오는 풍경을 보게되면 그림을 그려보는 것 보다 즉흥적 시를 읊거나 글로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림은 시간이 지난 후 당시의 감흥을 생각하면서 인상깊었던 대상과 장면 위주로 그려서 추억의 한조각으로 남기게 되고.. 그런데 시 구절이 적혀있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 단원은 시를 먼저 읽고, 시에서 받은 감흥을 그림으로 바로 옮겼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김홍도의 이러한 그림 두 점을 그려본다. 기려행려도(騎驢行旅圖)엔 남송(南宋) 진여의의 시, '기려행려'의 한 구절이 씌어져 있다. '客子光陰詩券裏(나그네 세월은 시권 속에 있고)
杏花消息雨聲中(살구꽃 소식은 빗소리 속에 있네)'라고.
그림은 추운 듯 온 몸을 덮은 두루마기를 걸친 선비와 나귀 뒤에 바짝 붙어 걷고있는 시동(侍童)의 모습이다. 계절은 나무가지에 연노란 꽃잎이 돋아나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추위가 가시지않은 이른 봄 같다. 뒤로는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하천엔 이끼와 잔돌이 드문 드문 보인다. 아이는 새로 피어나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지만 나귀를 탄 선비는 마치 시상에 빠진 듯 지긋이 눈을 감고 있다.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진여의에 대해 검색해보니 ' 남송의 시인이자 관리로서 24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중앙관직을 두루 거쳤다. 북송 말기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절, 나라가 금나라에 정복당하자 5년 동안 객지를 전전하다가 겨우 새로 생긴 남송으로 가서 관직을 받았는데 이 시를 짓기 1년쯤 전에 병을 핑계로 관직을 뒤로 하고 양자강 하구 삼각주에 있는 청진(靑鎭)이란 곳에서 절친들과 함께 소일하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다른 詩 한 구절이 씌어져있는 그림, 추성부도(秋聲賦圖). 이 그림엔 송나라 구양수가 지은 시 '추성부(秋聲賦)'가 씌어져 있는데 1805년, 단원이 사망하기 1년 전인 나이 61세 때 그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조로부터 절대적 신임과 후원을 받았던 단원이 정조 승하 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곤궁한 생활을 하다 죽음을 앞두고 그린 작품이다.
화폭의 오른쪽에는 메마른 가을 산이 그려져 있고, 중앙에는 중국식 초옥(草屋)이 있으며 둥근 창 안에는 구양수가 보인다. 구양수가 책을 읽다 밖에서 소리가 나자 동자에게 무슨 소리인지 나가서 살피라 했고, 이에 밖으로 나간 동자는 ‘별과 달이 환히 빛날 뿐 사방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星月皎潔 明下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라고 답했다는 구양수의 詩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자세히 보면 동자는 손을 들어 바람소리 나는 쪽을 가리키고 있고, 집에서 기르는 학 두 마리가 목을 빼고 그 바람소리에 화답하듯 묘사되어 있다. 또 마당엔 불어오는 바람에 떨어진 낙엽들이 드문드문 흩날리고 있다. 화면 왼쪽 언덕에는 나무가 두세 그루 서 있으며 그 옆쪽에는 대나무에 둘러싸인 초가집 위로 보름달이 떠 있다.
추성부도를 보니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떠오른다. 중국식 초옥이 좀 고급스럽긴 하지만 전반적인 추성부의 풍경은 초라한 집 한 채와 고목 몇 그루가 추위속에서 떨고 있는 세한도의 모습과 진배없다. 그림속의 구양수(단원은 내심 자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는 평생 고생이란걸 모르고 살다 견디기 힘든 제주도 유배생활을 한 추사의 모습과 닮았다.
두 그림엔 삶에 대한 관조와 쓸쓸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정조의 사랑과 후원하에 모든 면에서 자신감이 넘쳤고 다양했던 단원의 화풍이 두 그림에선 이른 봄 한기와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고 붓질에도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두 그림에 씌어져있는 시의 내용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단원은 시를 읽고, 시가 주는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감히 단언해본다. 수많은 그림으로 당대의 통속과 대화하고, 사람 사는 세상 모습을 알린 화가 단원 또한 글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가 남긴 시는 어떠했는지 궁금해진다. 시는 꾸밈없는 정직한 언어, 그림보다 더 강한 생명을 가진 표현이기에.
편협한 시각으로 권력만 쫒고, 세상의 단면만 보는 사람들이 시와 그림을 공부해보면 좋겠다.
20240820, Song s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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