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나타난 단원의 불교 세계
기록을 보면 단원 김홍도는 56세 때 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적극 지원해주었던 정조가 죽고 나서 모든 벼슬과 궁중 도화서를 떠나 힘든 생활을 했다. 62세 때 사망했으니 약 5~6년 동안 병과 시름하면서 곤궁한 삶을 보낸 것이다. 이 시기에 그린 그의 작품들은 모두 가을 걷이가 끝난 휑한 들판처럼 쓸쓸한 바람소리가 나는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내가 연필로 그려본 '소림야수도'와 '추성부도'이다.
단원의 그림을 연습하면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적해온 것은 그의 신앙세계의 흐름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신앙(종교적 신념)처럼 단원도 어떤 신앙에 가까운 내면 세계를 가졌는지를 발견해보는 것이었다. 난 2주 전 글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단원은 화필이 한창 무르익었던 30대에 도교적 그림을 그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내가 연습해본 그의 그림 군선도(群仙圖)와 그밖에 신선들이 나오는 그림들을 통해 후세의 미술가들이 그렇게 평을 했다.
유불선과 민간 토속 신앙이 중첩된 조선사회에서 풍속, 산수, 인물, 동물, 식물 등 만물을 섭렵한 단원의 내면세계엔 항상 불교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그림을 통한 나의 단정인데 기록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글이 있다.
"김홍도가 불교에 대해 신앙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46세(1790년) 때 용주사 건립 과정에서 정조의 명으로 대웅전의 후불탱화를 제작하면서 부터였다. 용주사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수원 현륭원 묘소의 원찰이다. 김홍도는 이명기, 김득신 등과 같은 당대 최고의 화원들과 함께 후불탱화의 제작에 참여했다". 또다른 기록을 보면, "김홍도는 47세(1791년) 때 세 번째로 정조 어진을 그렸는데 그 포상으로 충청도 연풍(지금의 괴산) 현감을 제수받았다. 그는 부임 후 상암사에서 기우제를 지내면서 녹봉을 털어 시주한 후 48세라는 늦은 나이에 아들 김양기를 얻었다. 김양기의 어릴 적 이름 연록(延祿)은 ‘연풍현감의 녹을 받을 때 얻은 아들’이란 뜻이다". 단원이 용주사 불화 제작에 참여한 사건이 불교 세계를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였다면 연풍현감 시절에 경험한 개인적인 체험은 불교를 신앙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불교 그림 3점을 그려보았다. 1점은 한달 전에 그린, 연꽃 무리에서 피어난 듯 흔들림없이 침착한 노승의 모습인 '염불서승도'이다. 이 그림은 단원의 종교관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때 그려본 것이었고, 오늘 그려본 2점(습득도, 고승기호)은 단원의 종교세계를 탐색해보다 만난 그림이다. '습득도'는 얼핏 보기에 마치 거지를 그린 것 같이 보이는데 거지를 그린 것이 아니라 습득이라는 유명한 중국의 행각승(行脚僧)을 그린 것이다. 행각승은 구걸을 하기는 하지만 본령은 거지가 아니다. 행장에 막대기 하나 가진 행각상을 보니 거지 인생으로 태어나 탁발승을 하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언뜻 떠오른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도 뜻이 높고 굳센 의지가 있으면 천하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주원장. 사람은 외모만 보고선 그 실체를 정확히 알수가 없다. 허술하고 가진 것 없어 보여도 본 모습을 알기위해선 정확한 눈과 마음을 가져야함을 그림이 말해주는 듯 하다. '고승기호(고승이 호랑이에 타다)'는 단원이 사망하기 2년 전인 나이 60에 그린 그림이다. 호랑이의 눈빛과 발톱은 아직 살아있지만 털은 군데군데 빠지고 윤색하지도 않다. 맨발로 호랑이 등을 탄 고승도 기운이 빠진 노승의 모습이다. 노쇠한 호랑이와 노승이 동병상린의 처지인 것 같은 느낌. 두 그림 모두 말년의 단원 작품이다.
단원은 도교에 이어 40대 무렵,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이후 불화를 많이 그렸던 것 같다. 절에 시주하여 아들을 얻었으니 불교에 심취했음직도 하다. 그러나 글로 그의 불성을 표현한 것을 보지 못했으니 짐작만 할 뿐이다.
20240826, Song s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