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통천풍경

도보사랑 2024. 9. 24. 19:36

통천풍경

고성에서 무려 8점을 그린 단원은 발길을 금강산 방향으로 돌린다. 단원은 정조가 금강산의 비경이 보고싶어 자신에게 그 비경을 화폭에 담아오라고 명을 내린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단원은 이제 곧 금강산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가슴 벅차하면서도 그의 걸음은 왕명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으리라 생각된다.

난 이전 글에서 '금강사군첩'에 수록된 그림들이 합리적인 걸음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특히 금강산 지역에선 더 그러함을 발견한다. 수록 순서를 따르면 통천에서 내금강 쪽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통천쪽으로 나와 그림을 그린 것이 된다. 내금강 내(內)에서도 합리적인 행로를 택했는지 가늠할 수도 없다. 그래서 수록 순서와 관계없이 통천 지역에서 그린 비경 3점(옹천, 총석정, 시중대) 모두를 먼저 모사해본다.

금강산 초입에서 동해와 맞닿아 있는 통천은 관동팔경 중 최고 비경인 총석정이 있는 곳이다. 난 이전에 속초 중앙시장에 갔었을 때 속초시엔 통천 출신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통천 송전면 아산리는 아산(峨山)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북한은 2019년 이곳에서 화성 미사일을 2회나 발사했다. 비경을 그리고자 그곳에 간 단원이 후일 금강산 기암에 '아바이 수령동지' 글씨를 새기고, 미사일이나 쏴대는 북한을 보았다면 무슨 말로 꾸짖었을까?

'옹천(甕遷)'은 '독벼랑'이라고도 불리우는 해안 벼랑길이다. 두 사람이 간신히 어긋나 지나치고 말은 한 마리만 겨우 지나갈 수 있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정신이 아찔하고 말이나 당나귀도 무서워 겨우 발을 떼놓는 곳이라고 한다. 고려말 왜구들이 이곳에 쳐들어왔을 때, 고성과 통천의 관민이 힘을 합쳐서 그들을 모두 바다에 빠뜨려 넣었다고 해서 ‘왜륜천(倭淪遷)’이란 이름도 얻었다고 한다. 단원의 그림도 천길 낭떠러지 벼랑의 모습이다. 벼랑 아랜엔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바닷물이 우레같은 파도 소리를 내는 듯 하다. 단원도 이 독벼랑길을 지나치면서 가슴 살짝 쪼였을 것 같다. 5년 전 이맘 때 금사강(金沙江)을 내려다 보면서 조심스럽게 걸었던 스촨성 차마고도가 떠오른다. 옹천, 이곳이 비경인 이유는 벼랑길을 지나면 펼쳐지는 모래사장과 넓은 마을, 산과 산사이로 금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水)을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단원도 독벼랑을 강조하면서 아름다운 이 풍경을 고스란히 담았다.

'총석정(叢石亭)'은 자타공히 인정하는 관동8경 중 최고의 비경이다. 옛부터 신선이 즐길 선경(仙景)으로 손꼽으며 시인 문객들이 이곳을 찾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총석정'이라는 정자 명은 바다 위에 빽빽이 솟아 있는 주상절리 돌기둥(叢石) 위에 세워진 정자라는 뜻이다. 그림엔 우뚝선 정자와 함께 그 옆에 앉아 동해창파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인상적이다. 총석들은 현무암이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에 부딪혀 그 면들이 갈라져 떨어지면서 여러 각형으로 서고, 앉고, 누워있는 등 다양한 모양세이며 돌기둥 위의 소나무는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단원은 이런 모습을 돌기둥에 부딪히는 파도와 함께 화폭에 담았다. 단원은 장구한 세월 자연이 빚어낸 이 비경앞에 서서 거센 파도같은 당대의 정치에 맞선 정조를 생각했을 것 같다. 자신을 적극 후원한 정조가 정적들의 위협을 잘 이겨내 조정을 안정시키고 평화로운 조선을 이끌어 나가기를 희망하지 않았을까? 유람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단원이 정조에게 '금강사군첩'을 바치며 어떤 말을 했으며, 이에 정조는 그 심경을 어떤 말로 드러냈을까? 화성 건릉에 누워있는 정조만이 알 뿐이다.

'시중대(侍中臺)'는 총석정에서 원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바닷가 호수인 시중호에 있었던 누대(樓臺)다. 시중호는 본래 바다가 육지 속으로 파고들어와 작은 만(灣)을 이룬 곳이 모래사장에 의해 만의 입구가 막히면서 형성된 석호(潟湖)로서 해수욕장과 진흙 온천장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단원의 그림엔 긴 모래사장 앞으로 펼쳐지는 바다에 작은 바위섬들이 떠 있고 우측 바다와 산이 접하는 곳은 뻘밭의 모습이다. 시간은 아침 해돋이 무렵인지, 저녁 낙조 무렵인지 모르겠지만 바다엔 붉은 빛이 감돈다. 이를 언덕위에서 바라보는 세 사람. 가상 인물들이겠지만 단원 자신이 묵객의 심정이 된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남북으로 아름다운 동해 바닷길을 걷고 이제 내금강으로 걸음을 옮기고자 하는 단원.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한 소동파 등 중국의 이름난 문인들이 그렇게 찾고자했던 내금강은 단원에게 또 어떤 감흥을 줄 것인지? 그의 걸음을 뒤쫒아 가본다.

20240924, Song s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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