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금강 장안동 계곡 풍경
통천을 떠나 금강산으로 들어간 단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로를 밟아 금강산 전체 절경을 다 둘러보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같은 동선에 위치한 비경들은 순서대로 보면서 화폭에 그 모습을 담았을 것이다. 장안사, 명연, 삼불암은 장안동 계곡 서로 인접한 위치에 있다.
'장안사(長安寺)'는 내금강 초입에 있는 사찰로서 유점사, 신계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로 이름나 있다. 6세기 고구려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여 창건했다는 것이 정설인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번 중수되었다. 특히 고려말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가 원나라 황실의 번영을 위해 크게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금수강산 우리의 땅에 있는 이름난 사찰을 원 황실의 안녕을 위해 웅장하게 중창했다니 나라의 독립성, 호국이념이 바래진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이 든다. 6.25전쟁 땐 폭격을 받아 수십 채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는데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종교를 아편으로 생각하는 공산주의 북이 관광수익을 목적으로 잘 중건하여 보존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된다. 단원의 그림속 장안사는 아주 웅장한 모습이다. 월정사 전나무숲 처럼 키 큰 수목들이 사찰을 크게 둘러싸고 있고, 사찰 우측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하천엔 작은 바위와 돌멩이 들이 무성하다. 물이 흐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갈수기 때 그린 것 같다. 이은상의 시조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가곡 '장안사'는 쓸쓸한 느낌의 곡조다. 이 곡이 탄생한 훨씬 이전에 장안사를 찾은 단원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금강산의 출입문 같은 사찰에 들어선 그는 그 장엄함과 불력(佛力)을 느끼며 평소 그가 원했던 세상에 비로소 안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오대산에서 적멸보궁인 중대(中臺)를 보았을 때 느꼈던 감흥과는 달리 금강산을 오롯이 가슴에 품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컸으리라.
'명연(鳴淵)'은 장안사에서 백천동을 지나 삼불암(三佛岩)에 이르기 전 석가봉과 배재령 사이의 계곡에 있는 소(沼)이다. 울소(鬱沼), 김동연(金同淵)이라고도 부르는데 못에 흐르는 물이 마치 사람의 울음소리와 같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 실(絲)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못 바닥에 닿지 않는다고 하며, 이따금씩 이무기가 나와서 사람을 해친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곳으로 못의 이름은 다음과 같은 설화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고려 말 장안사에 나옹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자신의 후계자가 될 상좌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여러 모로 보아서 표훈사에 있는 김동이라는 거사가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를 불러 상좌로 삼고 각별한 관심을 보이면서 불교를 가르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김동은 다른 마음을 먹고 어떻게 하면 스승인 나옹을 내쫓고 자기가 빨리 그 자리에 앉을까 하는 생각만 하였다. 나옹 스님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했다. 어느 날, 나옹 스님은 김동을 불러 말했다. '자네가 총명하고 지략이 깊기에 나는 자네를 나의 상좌로 삼은 것일세. 이제는 내가 나이가 너무 들어 내 자리를 물려주려 하네. 헌데 자네의 재주를 시험해 보아야겠네'. 나옹 스님이 제시한 것은 표훈사 어귀의 큰 바위에 불상을 새기는 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옹 스님은 큰 바위 옆면에 3구의 큰 불상을 새겼고, 김동은 뒷면에 60구의 작은 불상을 조성하였다. 모두 새기고 나서 많은 스님들과 함께 점검을 하였다. 그런데 나옹 스님이 새긴 3구의 불상은 한점 나무랄 데 없는 걸작품이었지만, 김동이 새긴 불상은 숫자만 많았지 졸작이었고 어떤 불상은 귀가 떨어져 없는 것도 있었다. 사정이 이쯤 되고 보니 김동은 자신이 내기에서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 틈을 슬며시 빠져나온 김동은 명연 옆에 있는 바위에 올라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동의 아들 3형제는 아버지의 시신을 부여잡고 구슬프게 울며 한꺼번에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음 날 울소에는 길게 누운 듯한 바위 하나가 생겨났고, 그 바위 쪽을 향해 엎드린 듯한 세 개의 바위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길게 누운 듯한 바위를 김동의 시신이라고 하여 '시체바위', 세 개의 바위를 아들의 죽은 혼이 화한 것이라 하여 '형제바위'라고 불렀다. 그리고 물이 소(沼)에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3형제의 구슬픈 울음소리와 비슷하다 하여 울소, 혹은 명연(鳴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설화에 나옹선사가 등장하니 선사의 다비식이 있었던 여주 신륵사가 떠오른다. 단원의 그림엔 이 긴 설화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명연 좌우에 비경의 바위산들만 서 있을 뿐이다. 장구한 세월속 물 흐름을 지켜보며 못에 이르러 그 울음을 토해내게 할 뿐이다. 단원은 명연의 설화를 상기하며 그 울음소리를 더욱 크게 듣고자 더 짙은 붓칠을 했을 것 같다. 그림을 다 그린 단원은 명연의 너럭바위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보며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라'는 설화의 교훈을 상기하면서 숨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삼불암(三佛巖)'은 명연을 지나 표훈사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마애불이다. 세모 뿔 모양 거암의 앞면에는 현재, 과거, 미래의 구원을 상징하는 석가, 아미타, 미륵의 3부처 입상이 새겨져있다. 그 모습들이 각양각색이라는데 단원의 그림엔 불상 표정이 뚜렷하게 묘사되지 않았다. 난 삼존불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왕 사는 세상 웃으며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에 웃음 띈 표정을 그려넣었다. 단원도 나의 가벼운 습작을 웃으며 허용할 것이다. 갈수기 모습의 계곡 하천이 화폭에서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불상이 중심이 되어야할 그림에 메마른 하천을 강조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그리고 불상보다 이를 바라보는 여섯 사람이 눈에 쏙 들어온다. 한사람은 글이 새겨져 있는 듯한 바위를 보고 있고, 두 사람은 삼불암을, 나머지 세 사람은 앉아서 여유롭게 삼불암 주위 경치도 함께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들이 산재해 있는 경주 남산을 생각나게 하는 삼불상 앞에서 세도정치로 꺼져가던 조선이 미륵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절경 유람에 나선 단원이 장안 계곡에서 만난 불교의 세계. 금강산은 '그리운 금강산' 노래 그대로 세상사를 주재(主宰)하면서 모든 것을 불러내는 듯 하다.
* 가곡 '장안사'
https://youtu.be/QrkhQF42Gn4?si=840LpGwgwXo-PTqi
20240928, Song s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