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풍경 4점
설악산을 떠난 단원은 고성땅에 들어선다. 고성은 남북 해안선과 동서 내륙으로 꽤 넖은 공간을 가진 땅이다. 송지호, 화진포, 거진항을 거쳐 통일전망대로 가는 길이 눈에 선하다. 푸른 동해바다, 눈부신 모래사장, 넓고 잔잔한 석호, 무리지은 해송들, 모양도 다양한 해안 기암들, 내륙쪽 웅장한 산들.. 북으로 가는 길에 펼쳐지는 내가 본 고성땅 풍경이다. 단원도 말을 타고 가면서 똑같은 풍경을 가슴에 담았을 것이다. 이 고성땅에서 단원은 무려 7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중 5점은 북한 땅에 위치하고 있는 비경들이다.
남쪽에 있는 2점(청간정, 가학정)과 휴전선 넘어 북쪽에 있는 2점(대호정, 해산정)을 먼저 그려본다. 연필로 그려보면서 단원이 느껴보지 못한 나만의 감흥을 가져본다. 갈라진 남북의 경계를 넘어면서 가져보는 통일의 염원.
'청간정(淸澗亭)'은 말 그대로 맑은 산골물이 흐르는 정자라는 뜻으로, 관동8경 중의 하나다. 맑은 산골물이란 설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을 말하는데 정자는 청간천이 동해바다와 만나는 기암 언덕 위에 세워져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엔 이 청간정에 대해 “석봉이 우뚝 솟았는데 층층마다 대와 같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된다. 위에는 용틀임을 한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만경루가 있으며, 대의 아래쪽에는 돌들이 어지럽게 불쑥불쑥 바다에 꽂혀 있다. 놀란 파도가 함부로 물을 때리니 물방울이 눈처럼 날아 사방에 흩어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원의 그림을 보면 이 기록과 비슷한 모습의 청간정 풍경이나 청간천은 보이지 않고, 어촌 마을(지금의 천진리 같다)과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담았다. 그림속 청간정은 지금과 달리 언덕이 아닌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난 군 휴양소가 있는 이 청간정에서 해질 무렵 아야진 해변으로 이어진 산책길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동해 창파의 모습을 감상한 적이 있는데 단원도 붉은 빚이 감도는 수평선과 고깃배 3척을 화폭에 담아 청간정이 관동8경 중 하나임을 강조했다.
신선이 학을 타고 간다는 이름을 가진 '가학정(駕鶴亭)'은 선유담(仙遊潭)이라는 못(淵)가에 지어진 정자인데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기록엔 "선유담은 간성에서 남쪽 12리 쯤에 위치한 골짜기안 못으로 주위가 2~3리나 되며 남쪽 산기슭의 한 갈래가 호수 가운데로 들어가고 바위 꼭대기는 평탄하여 3~40여 명이 능히 앉을 수 있다. 호수의 풍경이 마치 선녀들이 노는 것 같이 그윽하고 신비스럽게 보여 우암 송시열이 가학정 앞에 있는 천연 반석위에 달필로 '仙遊潭'이란 글씨를 새겼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단원의 그림도 서쪽과 북쪽이 모두 산록으로 둘러있고 동쪽 바다쪽엔 소나무가 무성한 모래언덕이 있다. 소년이 끄는 말(馬)에 선비 두 명이 타고 가학정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난 이 선유담에 가본 적은 없지만 대략 그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바다쪽 모래언덕은 지금 국도로 변했고 길이 끝나 바다와 접하는 우측 끝엔 거진항이 위치하고 있는 곳.
단원은 지금의 휴전선을 넘어 '대호정(臺湖亭)'에 이른다. 난 지금의 북한땅에 가본 적이 없기에 오로지 단원의 그림을 보면서 그 풍경이 주는 느낌을 갖고자 한다.
대호정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그림속 정자는 남쪽 높은 언덕에 웅거하고 있다. 앞엔 넓은 강이 흐르고 있는데, 물이 흐르지 않고 정지해 있는 호수같은 느낌을 준다. 북쪽으로 갈수록 날카로운 준봉들이 보이는데 금강산이 시작되는 것 같다. 동쪽으론 바다의 문(海門)과 접해 있는 것 같다. 웅장한 산들을 앞에 두고 호수같은 강에 만물의 형상을 담은 바위들이 즐비하여 대호정에 서면 한 수의 詩가 나올 것 같다.
'해산정(海山亭)'은 바다와 산 그리고 강을 아우르는 천혜의 요지에 세워졌다고 한다. 산수(山水) 모두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세워져 바다와 산을 다 취했다고 해서 '해산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림엔 서쪽과 동쪽에 거북이 모양 바위가 상스럽게 보이고, 북쪽으로는 대호정에서 바라본 것 보다 더높은 금강산, 동쪽으로는 해금강이 전개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강 아래 남쪽엔 큰 마을이 펼쳐져있다. 우측 거북 모양의 기암절벽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가운데 우거진 송림속에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져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당시 이곳이 고성의 중심 고을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여러 채의 건물 중 '해산정'은 어느 것인지? 관아처럼 보이는 건물들 오른쪽 언덕처럼 보이는 곳에 있는 독립 건물이 해산정인지, 아니면 마을의 제일 좌측 끝 강가 송림속에 있는 작은 정자처럼 보이는 건물인지? 난 두 건물 모두 노란색을 칠해 보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강가에 위치한 작은 정자가 해산정인 것 같다. 단원이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고, 내가 가보지못한 휴전선 넘어 있는 곳이니 추측만 할 뿐이다.
북으로 갈수록 금강산의 비경이 펼쳐지는 것 같다. 고성의 남은 비경 3점(해금강, 현종암, 삼일포)을 더 그리면 그 느낌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20240919, Song s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