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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전적지 답사(2018. 9. 14, 금)

도보사랑 2018. 9. 15. 09:58

인천상륙작전 전적지 답사(2018. 9.14, 금)

 

회색하늘빛아래 가을바람이 선선한 9월의 오늘, 6.25 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집어 백척간두에 서있던 자유대한민국을 구한 인천상륙작전 현장을 방문하였다. 역사적 사실에 목말라하고 현장토의에 열정적인 육사 역사탐방포럼 동기생들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3곳의 상륙현장(Green, Red, Blue beach)중 2곳과 팔미도 등대를 답보하였다. 인천시에서는 각군의 협조를 받아 내일 예정된 월미도에서 있을 전승기념일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크로마이트 작전,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상륙작전이었다. 작전은 1950. 7. 28일 대전을 점령하고 안동까지 진출한 북괴군 14개사단을 저지하기위해 낙동강방어선(워커라인)이 형성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단행되었다. 8. 28일 미합동참모본부의 최종 승인하 9.11일과 12일 일본 요코하마와 교오베, 사세보항을 출항한 7개국 연합군의 약 75,000명의 병력과 260여척의 함정은 제주도 남단에서 서해안에 이르는 체크포인트 아이오아~아칸사스~캘리포니아를 지나 9.14일 덕적도를 거쳐 영흥도에 도착하였다. 9.15일 00시 팔미도 등대 점화를 신호로 상륙은 9.15일 05:00부터 17:30분 어간 밀물시간대에 3곳(Green beach 월미도, Red beach 대한제분, Blue beach 송도)에 집중되었다. 상륙작전은 26일까지 11일동안 진행되었다. 당시 인천지역엔 북한군 약 2,000여명(월미도엔 4~5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말그대로 적이 예상치못한 시간, 장소, 수단과 방법으로, 적이 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도록한 기습작전이었다.(실제 모택동은 중국군 총참모부 작전실의 보고와 외교경로를 통해 들어온 보고서를 토대로 2개사단으로 편성된 미10군단과 한국군 1개여단이 인천으로 상륙할것이라고 예상했음)

 

팔미도는 인천연안부두에서 페리호로 약 50분 거리에 있었다. 등대는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한이후 1903년 6월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서 팔미도 등대점화는 영흥도까지 진출한 연합전단이 인천앞바다로 진격할수 있었던 상륙작전의 결정적인 시작점이었다. ' 15일 00시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는 맥아더의 작전명령을 죽음을 무릅쓰고 성공적으로 수행한 클라크 해군대위, 포스터 육군중위, 최규봉 KLO대장등 특공대원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상륙작전은 불가능했을것이다. 팔미도 현장에선 상륙전단의 위치, 항공과 화력지원, 상륙지점으로의 쇄도방법등에대해 상상력을 동원한 열띤 토론이 있었다.

 

백선엽장군은 6.25전쟁회고록에서 '아군이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지 못했다면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도 있을수 없었다'고 언급했다. 낙동강전선 다부동, 영산, 영천, 진동전투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지 못했다면 인천의 기적도 없었을것이다.

 

미 군수뇌부가 대규모의 전투력 분산, 부산과 인천이 450Km나 떨어져있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의 지리적 불리점을 이유로 군산으로 상륙할것을 권유했음에도 작전성공의 믿음과 확신으로 그들을 설득시킨 70대의 노장 맥아더, 승리의 등대점화를 위해 적진에서 분투한 특공대원들의 전투의지, 성공적인 망치작전을위해 불굴의 의지로 모루의 역할을 다한 낙동강전투.... 이 모든것이 인천상륙작전의 신화를 만들었다.

 

아직도 끝나지않은 전쟁, 결코 잊어서는 안될 전쟁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상륙작전을 바라보는 인천의 지역주민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다. 내일 거행될 기념행사는 그러한 정신이 고양되는 행사가 되어야한다.

 

시인이며 인천이 고향인 장순휘 동기생은 오늘의 행사를 위해 아침부터 수고를 아끼지않았다. 그리고 9월은 위대한 날들을 잉태했다며 시를 한수 선사했다. ' 1950년 9월 월미도의 꿈과 서울의 해와달'이란 시다. 말미 사진으로 첨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