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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과 민본(2018. 11. 30, 금)

도보사랑 2018. 12. 1. 12:42

역성혁명과 민본(2018.11. 30, 금)

 

* 백승종의 고전강독 "정치란 무엇인가"를 듣고...

 

齊나라 선왕이 물었다. "신하가 군주를 죽여도 되는 일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仁을파괴하는 자는 도적이고, 義를 파괴하는 자는 강도나 마찬가지입니다. 도적이나 강도는 그저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한명의 평범한 필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군주를 죽였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맹자 양혜왕 하》편에 나오는 대화다. 여기서 仁이란 군주의 품격, 능력을 의미하고, 義란 나라를 통치하는 기본 이념을 의미한다.

맹자는 충성의 근본적 대상은 왕이 아니고 백성이며, 잘못된 군주에대한 백성들의 응징은 반란이 아니고 권리임을 역설하는것이다. 이는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로서, 물은 배를 띄울수도 있지만 가라앉힐수도 있다는 순자의 君舟民水說과도 일맥상통한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仁과 義를 제대로 갖추지못해 축출된 왕들이 많았다. 그래서 왕들은 쫓겨나지 않으려고 공부를 열심히했다. 하루에 3회 공부외 학문과 정치를 논하는 경연(Royal lecture)은 기본이었고, 당대최고의 학문 스승으로부터 제왕학을 습득하였다. 제왕학 최고의 교과서는 사서의 하나인 대학을 설명, 주석을 붙인 대학연의(大學衍義)였다. 세종은 대학연의를 1,000번이상 읽어 正心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誠意로써 몸소 실천했다. 여기에서 민본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정창손이 "지금껏 백성들이 문자를 모르고 교육을 받지못해서 비루한 짓거리들을 해온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천품은 교육으로 고쳐질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고 말하며 한글창제를 반대했을때 세종은 "감히 어디서 과인의 백성을 능멸하느냐. 백성의 천품이 교화될 수 없다면 네놈이 정치를 왜 하느냐. 단지 백성위에 군림하면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선가"라며 질타했다. 백성은 귀하고, 임금은 가벼우며 권리보다 의무가 많은 사람으로 본것이 조선이었다.

 

정조도 君師가 되기위해 절치부심했다. 자신을 모든 개울에 비추는 보름달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며 만백성에 한점 부끄럼없는 왕이 되고자 노력했다. 정적의 견제속에 항상 불안해 하면서도 속필로 약 100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조선의 유교정신엔 왕과 백성사이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왕에겐 백성을위한 민본의 정치 의무가 있었고, 왕이 이에 부응하지 못할땐 역성혁명은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백성을 귀한 존재로 만들기위해 恒産을 중요시했다. 교육을 통해 백성이 산물을 생산할 능력을 갖추도록하고, 일정한 재산을 보유토록 함으로써 나라가 강제하지 않아도 사회가 스스로 돌아가는 오늘날의 중상층위주 국가를 이루고자했다. 정도전의 조선건국 설계, 조광조의 사회개혁, 퇴계의 성학십도, 율곡의 성학집요에 이러한 군주의 도리와 역할, 민본의 정신이 잘 나타나있다.

조선의 건국이념, 정신세계속에는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재주가 일을 감당하기 어려우면 그 지위에 있어서는 안되고 직책에 걸맞는 역량이 없으면 그 녹봉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사회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우리가 잘모르는 조선사회의 모습이다.

 

이러한 조선의 긍정적 정신세계와 사회 문화의 힘속에도 올바르지못한 군주를 맞이했을땐 항상 쇠퇴기를 겪었다. 국방을 방비하지못해 외침으로 국토를 유린당하고, 권력을 쟁취하기위한 당파싸움,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난무했다. 백성들의 삶은 속절없이 피폐해져갔다. 후기에 들어 실학파의 부활의 노력이 있었지만 정조이후 역량이 부족한 군주로인해 국운은 기울어져갔다.

 

조선 역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도자는 국가안보를 튼튼히 함은 물론 국민들의 恒産(민생경제)을 중시하고, 이에 실패하면 배는 언제든지 국민들에 의해 뒤집어질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만하지 않는 국정운영, 국익을위한 절치부심의 노력, 얕은 정치술로 국가를 당쟁의 도가니속으로 집어던지지 않도록 매사 유의해야 할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 평택에도 조선의 정신, 민본정치를 실천한 정도전과 김육의 흔적이 있다. 진위면 은산리에 위치한 정도전 묘(가묘)와 사당, 소사동에 위치한 김육의 대동법시행기념비를 다시 찾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