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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에서...(2019. 4. 4, 목)

도보사랑 2019. 4. 9. 16:15

구마모토성에서..(2019. 4. 4, 목)

 

큐우슈 구마모토(熊本)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구마모토성은 나고야성, 오사카성과 함께 일본 3대 성으로 불리운다. 에도시대 도쿄성이 그 명성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구마모토성은 임진왜란시 풍신수길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했다. 가토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의 협공에 울산 왜성에서 고립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포위망을 뚫고 일본으로 철군한 바있다. 당시 울산 왜성에서 고립된 약 1만 6천의 가토군은 성안에 우물이 다 마르고 식수가 떨어지자 말을 죽여 피를 받아먹으며 연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란이 끝난후 본국으로 돌아온 가토는 자신의 고향이며 본거지인 이곳 구마모토에 철옹성을 쌓았다. 성안에 100여개가 넘는 우물을 파고 유실수인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으며 넓은 공간엔 말들을 풀어놓았다. 가토가 식수와 식량에 강박적일 정도로 집착했던것은 울산 왜성에서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은행, 느티나무가 해자를 따라 울창하고 시내 식당가엔 말고기 요리점이 눈에 많이 띄이는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것이다.

 

구마모토성은 일본 역사상 최후의 내전인 세이난(西南) 전쟁시 그 진가가 발휘되었다. 이곳에서 가깝고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들이 배출된 가고시마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무라이들을 규합해 에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일본 최후의 내전, 세이난 전쟁당시 사이고를 따르는 1만 5천의 사무라이들이 큐슈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정부군과 첫 격전을 벌인곳이 이곳 구마모토성이었다.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에서도 나오는 장면이다. 4,000여명의 관군이 농성전을 전개한 구마모토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시간을 허비하여 관군 집결을 허용, 정부군에 패해 49세에 할복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우리는 관군이 아니라 세이쇼공(淸正公, 가토 기요마사에대한 존칭)에 진것이다"라고 말했다.

가토... 우리에겐 동래성에서 함북 회령까지 영토를 침탈당하고, 세자까지도 사로잡았던 그다. 그에 대해 구마모토의 지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구마모토 평야에 수로를 만들어 농지를 넓혔고, 봉토에서 생산된 곡식을 저장하여 환란에 대비했으며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승복하면서 평화를 갈구했다. 말년의 그는 종교와 차(茶)에 심취하였고 50세에 병사하였다"고..

 

화창한 봄날씨에 푸른 하늘과 활짝핀 사쿠라가 아름다운 성을 따라 걸으며 이런저런 임진란의 역사, 오늘의 일본과 한반도를 생각해본다. 2016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붕괴된 철옹성의 성벽과 천수각을 비롯한 많은 누각들, 이를 천천히 복구하면서 지난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소중히 다루는 일인들의 모습이다. 성입구 이곳의 상징인 구마몬을 중심으로 상가 중앙무대에서 펼쳐진 사무라이 공연도 재미있게 보았다

 

한번 와보고 싶었던 장소, 비록 지진복구로 성내부를 보진 못했지만 긴 성벽을 따라 걸으며 일본과 우리의 역사공간을 걸은것같아 먼곳이었지만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 한미와함께 한일이 친한 친구의 관계로 발전하면 우리의 미래는 밝아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