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곶 해파랑과 왕의길을 걷고..(2019. 5. 26, 일)
어젠 고교 3-9반 정모날이었다. 문과반 친구들이라 신라고도 경주에서 역사의 길을 걷기로 했지요. 포항사는 길수샘은 당일치기가 어려운 친구들을 하루일찍 호미곶 둘레길로 초대했다.
해병 청룡회관을 조금 벗어나 걷기 시작한다. 한반도의 최동단지역인 호랑이꼬리 호미반도끝 조금 못미쳐 위치한 九龍沼, 고려충렬왕때부터 아홉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곳이다. 높이 40~50m, 둘레 100m 정도의 움푹 패여있는 기암절벽 지역이다. 용이 살았다는 沼와 여러형상의 바위사이로 에머랄드빛 맑은 바닷물이 출렁이고 있어 신비감을 준다. 푸른바다로 떨어지는 저녁낙조가 운치를 더해준다. 여기서 걸음을 멈추었지만 호랑이 꼬리를 돌아가면 구룡포, 더 나아가면 문무수중능이 있는 감포다. 신라의 역사가 이어지는 곳이다.
다음날은 친구들과 '왕의길'을 걸었다.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되어 신라를 지키고자한 문무왕의 장례행차길이며 아들 신문왕이 부왕을 추모하기위해 수중대왕암으로 자주 행차했던 길이다. 충과 효의 길인것이다. 안내표지판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시작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경주와 감포를 이어주던 길, 사람과 문화를 이어주던 길이기도 하지만 왜구가 동해에서 월성으로 침략하던 주된 통로의 길이었다"고... 문무왕이 왜 동해의 용이 되고자했는지, 고구려의 힘을 빌려 왜구를 물리친 당시의 신라 모습을 보는듯하다. 삼국유사엔 신문왕이 동해의 용이된 부왕인 문무왕에게 신라의 보배인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위해 행차했던 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용이되고, 용이 왕이되어 광명으로 나라를 밝히던 길, 신라사직을 오래동안 이어가기위해 미래의 비전을 모색하던 길인것이다. 세찬 바다바람이 멈추고 거친 물결을 평온하게 잠재웠던 피리(만파식적)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음률을 듣는듯하다. 삼국통일후 전쟁에지친 백성을 위로하고 화합과 평화의 새시대를 열고자했던 신라인들의 염원과 의지의 목소리, 피리소리 말이다...
반월성에서 추원사~모차골 ~용연폭포~기림사~감은사지~이견대~대왕암으로 이어지는 왕의길에서 우린 추원사~기림사까지 구간 약 9.7Km을 걸었다. 우거진 숲그늘이 오르막 경사없이 수레와 마차가 지나칠 정도의 좁고 완만한 길을 드리우며 간간히 동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좋게해준다. 용모습이 새겨진 옥대의 한 마디를 물에 담그니 한마리의 용이 승천하고 폭포가 되었다는 용연폭포 시원한 물에 친구들은 발을 담근다. 서울, 부산, 마산, 창원등에서 먼 길을 달려와 역사의 길을 함께 걷고 변함없는 건강과 우정을 다짐해보는 세족이다.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기림사의 가람은 웅장하고 고색창연하다. 천축국(인도) 광유성인이 창건했고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원효대사가 크게 중창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불상을 모셔놓은 법당인 대적광전이 인상적이다.
왕의길을 걷고 남은 시간엔 가까운 곳을 답사해본다. 유배거(流盃渠)의 유적지로서 경애왕이 이곳에서 연회를 열어 놀다가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은 포석정, 뛰어난 외교관이면서 삼국통일의 열망을 쏟은 무열왕 김춘추의 능, 이를 힘으로써 뒷받침한 김유신의 묘를 둘러본다. 서악고분에선 누구의 무덤인지를 두고 가벼운 논쟁도 해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역사의 길을 걸으며 체력도 단련하고, 40년전의 추억으로 돌아가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서 익어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해본 三九會 정모, 재엽회장님이 수고 많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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