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송시열

도보사랑 2022. 11. 9. 16:21

주기론자 서인 송시열(1607~1689)은

 

선조가 56살로 죽기 1년 전에 즉 임진왜란 종료 9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29살이며, 30살의 효종이 등극할 때 42살이며, 18살의 현종이 등극할 때 52살이며, 13살의 숙종이 등극할 때 67살이었습니다. 경신환국(1680년)때에는 73살이었으며, 기사환국 때 82살로 죽습니다, 

그리고 ​인조반정 때(1623년, 광해 즉위 15년 후, 광해군 48살, 인조 28살, 소현세자 11살, 봉림대군 4살) 16살이었고, ​인조 시절 1633년 26살에 생원시에 장원급제를 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敬陵) 참봉이 되었으나 곧 1개월 만에 사직하였고, 그 2년 뒤인1635년(인조 13년)에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병자호란(1636년, 인조 41살, 소현세자 24살, 봉림대군 17살, 송시열 29살)때는 봉림대군과 강화도로 가지 않고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갑니다, 거기서 자신을 추천했던 주화론인 50살 최명길이 아닌 척화론의 66살의 김상헌과 의견을 같이 합니다, 청에 항복한 후 송시열은 고향으로 낙향을 합니다,

효종이 30살에 즉위할 때(1649년) 42살이었습니다,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관직을 내리자 다시 정계에 등장합니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명나라가 중화이고 청나라는 오랑캐) 복수설치(復讐雪恥)(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거론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50년에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당하고 강원도 홍천에 유배를 가게 되고 거기서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 후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고 1657년 상을 마치게 됩니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인 1659년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는 과정에 효종과 독대(기해독대)까지 합니다, 그 후 3개월 뒤 효종이 갑자기 죽습니다, 

이 독대의 내용은 송시열의 기록에 의하면 송시열은 부국강병을 주장하였고 소현세자의 민회빈의 무고함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송시열은 강경한 북벌보다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해 봅니다, 

송시열이 효종의 사부였지만 중앙관직에는 초반에 잠깐 그리고 후반에 1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산림의 거두가 되어 효종인 임금도 늘 자문을 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18살의 현종이 즉위할 때(1659년) 즉 기해예송(1659년)때에는 52살로 남인인 63살의 허목(1596~1682)에게 승리를 합니다, 그런데 1660년 72살의 윤선도(1587~1671)는 허목(1596~1682)을 변호하면서 송시열이 장남인 소현세자와 차남인 효종을 분리하려 한다며 사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송시열은 지금까지는 남인을 당이 다른 사대부로 인식하였으나, 자신을 사형시키라는 탄핵상소를 접하게 되면서 이후에는 남인을 친구가 아닌 것으로 규정하고 대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종의 부인으로 숙종의 엄마인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1619~1675, 대동법 김육의 아들)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1659년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됩니다, 

그 후 현종 15년 간 현종이 간청을 하였으나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으로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막강한 신임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현종이 죽기 3개월 전에 현종엄마가 죽었을 때 일어난 갑인예송(1674년)때에는 67살로 남인인 78살의 허목에게 패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인들의 거듭된 공격으로 1675년 함경남도로 유배되었다가, 그 뒤 경신환국이 일어날 때까지 여러 곳으로 옮기게 됩니다,

13살의 숙종이 등극할 때(1674년)는 67살이었고, 숙종 등극 6년 후에 남인인 70살의 허적을 상대로 승리하는 경신환국(1680년)에서는 73살이었습니다, 그 해 10월 중앙정계로 복귀를 합니다. 

1683년(숙종 9년) 고령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문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숙종엄마 명성왕후 아버지 형의 아들), 김익훈 등을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송시열이 처음에는 김익훈이 허새의 옥사를 날조하여 죄없는 남인 인사를 죽인 소식을 듣고 처벌에 찬성하였으나, 김석주의 설득으로 의견을 번복하고 김익훈의 편을 들게 됩니다, 

이때 서인 내부의 소장파와 청년층이 송시열에게 실망하여 돌아서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제자였던 윤증(尹拯)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인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게 됩니다, 이후 사직을 한 후 고향으로 낙향을 합니다.

그리고 숙종이 28살일 때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기사환국 (1689년)이 일어나 사약을 받고 82살로 죽었습니다,

 

주리론자 남인 허목(1596~1682)은

송시열보다 11살이 많았으며, 과거를 보지 않았기에 59살(1655년, 효종 6년)에 천거로 윤휴와 함께 발탁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40살이며, 30살의 효종이 등극할 때 53살이며, 18살의 현종이 등극할 때 63살이며, 13살의 숙종이 등극할 때 78살이었습니다. 경신환국이 일어나고 2년 후이고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죽는 기사환국 7년 전에 86살로 죽습니다,

허목은 효종의 장례식에서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두고 벌린 1차 예송논쟁인 기해예송(1659년)에서 송시열이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를 두둔하고 차자인 효종을 무시한다고 하면서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청남파라고 합니다, 이 논쟁에서는 송시열에게 패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의 장례식 때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두고 벌린 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1674년)에서는 서인파인 송시열에게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숙종 1년에 같은 청남파인 윤휴가 북벌론을 강하게 주장하지만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숙종 등극 6년 후에 경신환국(1680년)이 일어나지만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 송시열 죽기 7년 전에 즉 기사환국(1689년)이 일어나기 7년 전에 86살로 죽습니다,

주리론자 남인 허적(1610~1680)은

송시열보다 3살이 적었으며, 27살에 문과 급제(1637,병자호란 1년 뒤)를 합니다, 30살의 효종이 등극할 때 39살이며, 18살의 현종이 등극할 때 49살이며, 13살의 숙종이 등극할 때 64살이었습니다. 경신환국 때 70살로 죽습니다,

허적은 효종의 장례식에서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두고 벌린 1차 예송논쟁인 기해예송(1659년)에서 송시열이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를 두둔하고 차자인 효종을 무시한다고 하면서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한 청남파인 허목과 윤휴와는 달리 온건한 주장을 탁남파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른 남인들처럼 축출당하지 않았습니다, 

1664년(현종 5년,23살) 54살에 의정부우의정에 발탁되어 그 해 사은사 겸 진주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그해 영의정이 되었으나 사퇴했습니다, 1668년(현종 9년) 의정부좌의정이 되었고, 1671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672년 송시열의 비판을 받아 사퇴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었으나 곧 영중추부사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충주로 낙향하였습니다,

낙향된 지 2년 후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의 장례식 때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두고 벌린 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1674년)에서 남인파가 서인파인 송시열에게 승리를 하자 64살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복직하게 됩니다. 이 후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강경파인 허목과 윤휴와 대립을 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33살의 현종이 3개월 만에 죽자 13살의 숙종이 등극을 합니다, 이 숙종 1년에 같은 청남파인 윤휴가 북벌론을 강하게 주장하지만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숙종 등극 6년 후에 임금전용 기름칠 천막 무단으로 사용하여 숙종의 눈에서 벗어나게 되고(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음) 그 후 1달 뒤 서자인 허견이 인조 3남 인평대군의 3아들과 역모를 한 협의로 받고 사사 된 후 70살의 허적도 사약을 받고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경신환국(1680년)입니다, 

이로써 선조 때부터 집권층으로 등장한 남인은 몰락을 하게 됩니다, 이 남인세력은 장희빈으로 인한 기사환국(1689년)으로 잠시 등장하지만 5년 만에 갑술환국(1694년)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주리론자 남인 윤휴(1617~ 1680.5)는

송시열보다 10살이 적었으며, 과거를 보지 않았기에 38살(1655년, 효종 6년)에 천거로 허목과 함께 발탁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19살이며, 30살의 효종이 등극할 때 32살이며, 18살의 현종이 등극할 때 42살이며, 13살의 숙종이 등극할 때 57살이었습니다, 경신환국 때 63살로 죽습니다,

윤휴는 효종의 장례식에서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두고 벌린 1차 예송논쟁인 기해예송(1659년)에서 송시열이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를 두둔하고 차자인 효종을 무시한다고 하면서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청남파라고 합니다, 이 논쟁에서는 송시열에게 패배를 하였습니다, 

그 후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의 장례식 때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두고 벌린 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1674년)에서는 서인파인 송시열에게 승리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33살의 현종이 3개월 만에 죽자 13살의 숙종이 등극을 합니다, 이 숙종 1년(1675년)에 같은 청남파였던 윤휴와 탁남파인 허적이 북벌론을 강하게 주장하지만 같은 파인 허목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윤휴는 허목과 함께 송시열을 죽여야 한다고 또 다시 주장을 합니다, 그렇지만 허적은 반대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윤휴는 둘 사이에서 조정을 하다가 허적의 편에 서게 되어 허목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후대의 남인은 허목과 윤휴 중 누구를 정통으로 보느냐를 두고 논란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성호 이익은 허목을 정통으로 보고 윤휴를 패리라고 주장한 반면 다산 정약용은 윤휴의 노선이 선명하고 허목의 견해는 선명하지 못하여 다소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이 후 윤휴는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가 1679년 비변사제조에 다시 임명되고, 1679년(숙종 5년) 9월에 우찬성이 되었습니다. 이후 윤휴는 삼정승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1680년 허적이 자신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받는 연시연 때 비가 오자 왕이나 왕실의 허락 없이 기름 천막을 임의로 가져다 쓴 사건이 확대되어 1달사이로 허적의 서자 허견의 옥사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경신환국(1680년)입니다,

그러나 윤휴는 허견의 옥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나 여러가지 죄목이 복합되어 파직되고 의금부에 갇혀 국문을 당하다가 63살(1680년)에 사사되었습니다,

서인 소론 윤증(1629 ~ 1714.1)은

윤증(尹拯, 1629년 ~ 1714년 1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당색은 서인, 소론의 영수이다.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며, 서인 윤선거, 김집, 유계, 권시, 송시열의 문하생입니다. 후에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할 때 소론의 영수가 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7살이며, 30살의 효종이 등극할 때 20살이며, 18살의 현종이 등극할 때 30살이며, 13살의 숙종이 등극할 때 45살이었습니다, 숙종죽기 6년 전에 85살로 죽습니다, 

유계(兪棨),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시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김집의 추천으로 김집 사후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숙종엄마 명성왕후 아버지 형의 아들), 김익훈 등을 지지한 송시열에 염증을 느껴 후일 노론이 된 주류파와 갈등하였으며,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1669년, 현종시절 숙종등극 5년 전)로 발생한 회니논쟁을 계기로 송시열과 절교한 후 소론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회니논쟁이란 윤증의 아버지 윤서거가 주자해석에 자신의 해석을 한 윤휴에 동조하였기에 송시열이 싫어하였습니다 그런데 윤서거의 아들인 윤증이 아버지 묘비문을써 달라고 송시열에 부탁을 하였는데 그 내용을 가지고 윤증과 송시열이 논쟁을 벌인 사건입니다, 

회니논쟁이라는 말은 송시열의 집이 회덕(懷德: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에, 윤증의 집은 이성(泥城: 현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있었던 연유로 '회니(懷泥)의 반목' '회니논쟁'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 부릅니다, 

경신환국(1680년) 후 남인을 처벌하는 데 있어서 온건론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가 되어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노론과 싸웠습니다. 1683년(숙종 9년) 임금의 부름으로 과천까지 왔으나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제시하고 귀향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며 후학 양성과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1684년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했을 때는 이와 같은 점이 참작되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출에 심히 분개하였으며, 갑술옥사 때는 남인에 대한 온건론이나 화합론을 거둡니다. 윤증은 출사하지는 않고 소론의 영수로서 막후에서 소론계열을 지원하였습니다. 1695년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1701년 의정부좌찬성에 임명되었으나 이 역시 사직하였습니다,

윤증은 숙종이 59살로 죽기 6년 전인 1714년 1월 30일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에서 병으로 85살에 사망합니다. 그가 죽자 숙종 임금은 직접 하교를 내려 애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윤증은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이는 그의 학문적·정치적 위치를 반영할 뿐 일체 사양하고 실직에 나아간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고 합니다,

 

禮訟論爭

구분 기해예송
(1659)
갑인예송
(1674)
시기 효종 사후(현종때) 효종비 사후(숙종때)
내용 자의대비(인조의 계비=효종의 계모)가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
서인 · 효종은 적장자가 아니다
· 왕과 사대부에게 적용되는 예는 같다
· 신권의 강조
1년설 9개월설
남인 · 효종이 적장자가 될수있다
· 왕과 사대부에게 적용되는 예는 다르다
· 왕권의 강조
3년설 1년설
경과 서인의 승리 남인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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