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주자학에 대한 성호 이익의 비판적 접근

도보사랑 2022. 11. 15. 23:30

1. 중용(中庸)의 명구들

   - 도(道, 실천할 그 무엇)는 멀리 있지 아니하다. 사람이 도를 행하되 사람에게서 멀리 한다면 도가 될수없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고자하면서 사람에게서 멀리한다면 도가 아니다.

   - 용덕을 행하며 용언을 삼간다.(庸德之行 庸言之謹이라). 언행일치,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아야한다.

   - 정치의 성패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제도가 먼저냐, 인물이 먼저냐는 물음에 답은 인물이다.

   - 군신과 부자와 부부와 형제와 친구의 사귐. 이 다섯가지는 천하의 달도이다. 즉 중용의 핵심은 아름다운 관계에 있다.

   - 知(지식, 지혜)와 仁(마음, 정의로움)과 勇(용기, 실천), 이 세가지는 천하의 달 덕(덕에 이르는것)이다. 배움을 좋아하는것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것은 인에 가깝고, 수치를 아는것은 용에 가깝다.

   - 誠, 곧 진실과 정성이 모든 일의 요체이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것은 9가지 큰법이 있으나 거기에 가도록 하는것은 하나, 誠이니라. 성이 중용의 핵심.

 

2. 성호 이익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

  - 성호 이익은 아주 불쌍한 사람이었다. 부친의 두번째 부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성호가 어릴때(숙종시)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후 성호의 어머니는 안산으로 하향했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스승과도 같았던 형이 숙종에게 상소문을 올린적 있는데 숙종은 이에 분개하여 형을 주살했다. 고아인 성호는 종들에 의지하여 살았는데 절약외엔 살아갈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노동의 주체인 종들에게도 존대말을 했다. 성호 마음의 스승은 퇴계 이황이었고 항상 절약, 조신하면서 살았다. 아들도 일찍 죽었다. 17세기 이후 조선사회는 부자는 더욱 부자,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사회였다. 성호는 어떻게하면 세상을 구제할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가난을 구제코자 직접 양계와 농사도 지었다. 성호가 죽을때 유언도 절약이었다. 일반 백지에 조문을 쓰고, 있는 반찬으로 제사상을 차리고, 상복도 평소 입는 복장으로 입도록 유언을 남겼다. 성호의 가장 큰 제자는 다산 정약용이었다. 즉 다산이 성호의 사상을 계승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호는 어렵게 성장하면서 실증적 학문을 하였으나 지식인으로서 최대한 학문의 자유를 누린 점에 있어선 행복한 학자였다. 성호가 살았던 시대는 영조시대였기 때문이다.

   - 성호의 생각과 주장(①중용은 어려운 책이다. ②사문난적 시비는 잘못이다. ③진정한 공부법은 역사적 고증, 실증으로 터득하는 지식이다.  ④천주교와의 만남) 

  ① 중용은 어려운 책이다.

     - 程子가 말한 공부 순서는 대학-논어, 맹자- 중용의 순이었다. 중용은 쉽게 읽을수없는 책이다.

     - 대학은 통치철학의 책, 논어는 仁의 학문, 맹자는 義의 학문.

     - 특히 맹자에 있어선 역성혁명론, 井田(가운데 밭 공동경작/분배, 恒産), 정의로운 사회는 모두에게 기본 소득이 있는 사회다. 맹자를 공부하면 논리적인 사고가 생긴다.

  ② 사문난적의 시비는 잘못이다.

     - 송나라 성리학의 완고함은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주희의 "중용장구집주"가 세상에 퍼지자 이책을 해와 달처럼 떠받들었다. 학문을 할때는 의심을 품어야한다. 의심이 없으면 배워도 굳건하지 못하다.

    ※ 임란이 일어나기전 16세기 조선은 자유로운 학풍의 시대였다. 이언적은 "대학장구"를 고쳐 "보유서"를 저술하였으며 이이 율곡은 "중용장구집주"의 일절(기이성형이역부)의 잘못을 주장하며 "성학집요"를 저술하였고 이 책들은 간행되어 경연에도 올랐다. 이것이 주자의 진정한 학문적 태도였다. 즉, 16세기 조선에는 학문적 금기가 없었기에 사단칠정론, 태극설, 이기설등이 나왔다. 그러나 전란후인 17세기엔 사회를 치유하기위해 정통을 정해놓고 다스려야할 시기였기에 사상적, 학문적 자유가 제한되었다. 즉 사상검열은 17세기부터 시작된것이다.

③진정한 공부법은 역사적 고증, 실증으로 터득하는 지식이다. 

     - 성호는 처음에는 중용장구집주를 믿고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고증이 최우선이다고 생각했다. 고증의 예로, 중용은 양나라(4세기)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양나라 간문제에 "중용은 천경, 지의의 가장 높은 곳이다. 나면 충성하고 들면 효도하는 도리로서 실로 가르침을 세우는 관건이요 덕행의 지향점이다"고 기술되어 있다고 했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저작에 "중용은 원래 47편이었는데 진시황때 분서되어 1편만 남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있다고 고증했다.

     - 맹자에 관해서도 맹모삼천의 고사는 허구이며 맹자가 늙어을때 양나라 혜왕을 만난것이 아니고 20대에 만났으며, 맹자의 스승은 자사의 제자가 아니며 자사의 손이다고 고증했다.

     - 학문은 실증적이라야 한다며 주희의 주장에도 잘못된 점이 얼마든지 있고, 대가의 명성에 기대어 학문을 신망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역사적/실증적, 비판적 관점이 학문방법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 형이상적(관념적, 추상적, 헤겔의 입장) 경전해석에 반대하고 각종 문헌을 통한 검증만이 학문의 올바른 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실증적 연구(헤겔에 반대되는 쇼펜하우의 입장)가 유행하고 18세기 이후 진보적인 학풍이 자리잡은것은 성호가 거둔 성과였다.

     - 성호의 민수(敏樹) 개념 : 땅의 도는 나무에게서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 즉, 땅은 나무를 잘 자라게 한다고 보는 개념으로서 백성이 나라를 원망하는것도 나무잎이 병드는것과 같은 이치로서 좋은 임금을 만나는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人道敏政 地道敏樹)

     - 3대 제사도 대부 가문의 예법이거늘 "아비가 대부(大夫)이고 아들이 사(士)이면 장사는 대부의 예로 지내고 제사는 사의 예로 지낸다"고 주장하며 제사의 기준을 경제력으로 보았다.

④천주교와의 만남

     - 성호는 천주교에 대해 "추상과 애매한 형이상학에 매달리면 이단이다. 상제를 말하는 카돌릭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단이다"고 보았다.

     - 이후 성호의 문하가 분열하여 천주교의 박해로 이어진다.

       * 성호 좌파 : 권일신을 중심으로한 신서파로서 천주교 신앙파. 정약용도 신서파였다.

       * 성호 우파 : 안정복을 중심으로한 공서파로서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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