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자학에 있어서 性, 道, 敎란?
- 하늘이 명한것을 성이라하고, 성(착한성품)에 따르는것을 도(선한 생활실천)라하며, 도를 닦는것을 교(도를 닦는것)라한다. 이중 도란 한시도 버릴수없는것이며 떨어질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래서 선한 실천을 제일 강조하는것이 주자학의 핵심이다.
- 중(中)과 화(和)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잡히며 만물이 길러진다.
- 공자는 中庸(지나치게 모자라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현명한 행동의 道)이 어려운것에 대하여 " 도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내가 안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知者는 過之하고 愚者는 不及也라)"라고 하였다.
2. 조선 16세기 말 -17세기에 있어서 사문난적(斯文亂賊)
- 15세기는 조선의 중용이 널리 퍼지는 시기였고 두 전란(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사문난적 문제가 발생
- 송시열(서인)이 윤휴(남인)를 보고 이른 말이다. 유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로 4사람(윤휴, 윤증, 박세당, 정제두)을 지적했다. "중용장구집주(중용의 해설서)"를 둘러싼 시비로서 송시열과 윤휴의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 당시 30세였던 송시열은 1637년(인조 15) 윤휴(당시 21세)를 속리산에서 만나 "30년의 나의 독서가 가소롭다"며 윤휴의 뛰어남을 칭찬하였으나 이후 1644년(인조 22년) 윤휴의 "중용설(중용장구집주의 변형, 장과 절의 순서를 바꾸고 주석도 자의 해석한것)"에 대해서 "주자이후로는 한가지 이치, 하나의 글자도 밝혀지지 않은것이 없는데 무슨 의혹이 있다고 논란을 일으키는가"라며 윤휴를 강력하게 비판.
- 이후 국정현안에 대해서도 의견이 대립. 윤휴는 청나라의 북벌을 강력 주장하였지만 송시열은 현실적으로 접근. 2차례의 예송논쟁(기해예송, 갑인예송)을 통해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고 9년뒤 송시열도 같은 운명으로 사약을 받았다. 서인은 이후 노론(송시열)과 소론(윤증)으로 분당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에 대해선 앞글 송시열을 참고
- 이후 17세기 후반은 검열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글을 쓰지 못하는 "사상의 자유가 없는 조선사회"가 되었다.
- 사문난적이 일으난 배경
① 독창적이고 패기만만한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질투심?
② 남인(윤휴)을 누르기위해 송시열이 주희의 화신처럼 행세?
③ 숙종이 양측의 학문적 논란을 정치적으로 악용?
※ 송시열, 윤휴, 숙종도 선비였음을 감안해볼때 정치투쟁과 경전해석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냐, "우리는 옳고 너희는 틀리다"고 보는 도덕지상주의, 다원적 가치관 부정 시각은 비판을 받아야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점에서 당시 조선사회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은 다르지않음을 안타까와하지 않을수없음.
※ 우리 조상들은 宋의 주자(주희)에 대해 잘알지못했음은 아닌가? 주자는 당시 출판사를 경영한 사람이었고 그의 저작들은 생전에 금서였다. 이러한 주자의 학문을 절대가치로 여기며 신봉하였고 이로인한 붕당의 정치가 시작된 조선이었다. 그리고 주자(객관적유심론)와 육상산(주관적유심론)은 견해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우정을 유지했음을 알아야한다.
- "사변록"을 통해 주희의 "사서집주"를 비판하고 논어, 맹자, 대학 및 중용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양주 수락산 아래에서 학문을 연구해온 박세당(송시열보다 22세 연하)은 공자, 맹자의 본질에 닿고싶었다. 특히 이경석의 삼전도 비문에 대해 박세당은 "신도비문"에서 이경석을 군자로 칭했고, "예송변"에서 종통(적자)문제가 왜그렇게 중요하냐며 비판한것에 대해 송시열 일파는 이경석을 송나라를 팔아먹은 진회(秦檜)의 아류라며 이경석을 옹호한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탄압함
- 강화도 하곡으로 은거한 정제두는 " 유교의 경전은 뜻을 아는 사람이 읽으면 저절로 다 이해가 된다. 굳이 주(主)를 달고 해설을 붙일 필요가 전혀없다", "주자의 해석이 경문 본래의 뜻을 어겼으므로 다시 고쳐서 해석을 하지않을수 없다"라며 탈성리학을 주장함으로써 노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으나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는 정제두를 옹호하여 정제두는 82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 이러한 조선사회에서 숙종과 영조를 어떻게 볼것인가. 숙종은 당쟁의 지휘자로서 당파싸움을 통해 이득을 보고자 한것은 아닌지? 그러나 실제적으로 왕실은 불안정하였고 숙종과 대신들은 중용 즉, 성리학적 가치관(도덕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반해 영조는 숙종의 정치가 분란만 초래하고 당쟁을 고질화했다고 보면서 탕평책을 추진하면서 학문적 논쟁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영조는 탕평파 등용, 사림의 존재부정, 사원대폭정리, 이조전량의 권한축소, 후임자 천거권과 3사관리선발권 폐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 결론적으로, 조선 성리학은 정치적인 측면이 강했다. 주자학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중용은 성실, 진실, 존중, 자존감임을 알아야하고, 상대를 너무 도덕으로 재단하는 愚를 범해선 안된다는 교훈을 얻어야한다.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용과 시골선비 박사철 (0) | 2022.11.23 |
---|---|
주자학에 대한 성호 이익의 비판적 접근 (0) | 2022.11.15 |
송시열 (2) | 2022.11.09 |
임관 40주년 행사(2022. 10. 7, 금) (0) | 2022.10.08 |
정선여행 (0) | 2022.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