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중용과 시골선비 박사철

도보사랑 2022. 11. 23. 11:20

1. 중용 명구

  - 自誠明과 自明誠, 정성됨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것을 성이라 말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럽게 되는것을 교라 말한다. 정성스러우면 곧 밝아지고 밝으면 곧 정성스러워지는것이다.

  - 정성만이 사물을 감화시킨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됨이야 化하게 할수있는것이다. 작은 변화가아닌 본질적인 변화, 즉 내가 먼저 정성을 다하는것이 변화를 가져올수있다.

  - 정성이 곧 조화를 일으키는 神이다.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은것이다.

  -정성이라는것은 만물의 처음이요 끝이니 정성스러움이 아니라면 만물은 없는것이다. 정성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그것은 진실(진정성)이다.

  - 우주를 지배하는 영원한 진리는 중용. 中은 가운데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곧 관계를 의미한다. 극단에 있지않고 중간에 있음은 예를들어, 인간관계에 있어서 매달리지도 않고 의존하지도 않는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높고 밝음을 추구하는것은 지식과 성찰의 삶을 통해 생태적 자아를 구현하는것으로 이것이 곧 중용의 삶이다.

  - 군자가 살아가는법은 덕성을 높이고 배움의 길로 가는것(道問學)이다. 학문이 아닌 문학(먼저 묻고 배움을 실천하는것)이 중요. 군자는 자기 선전과 흥행에 매달리지 않는다. 군자의 도는 어둑어둑 하면서도 날로 밝아진다.

  - 군자는 독실하고 공경(겸손)함으로써 천하를 화평하게 한다. 정성과 공경이 우리가 나아갈 길로써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한는 사람만이 나라를 변화게 할수있다.

  -- 외면의 위엄은 통치의 말단(하수)이다. 聲(목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는것)과 色(옷을 폼있게 입는것)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있어서 下手다. 

  ※ 人一能之이든 己百之하며 人十能之이든 己千之니라.(다른 사람이 한번에 할수 있다면 나는 백번을 해서 하며, 다른 사람이 열번에 할수있다면 나는 천번을 해서 한다.). 즉 정성을 다해서 진실로 한다. 

 

2. 시골선비 박사철(정조때 문체 반정의 와중에 명성을 얻다)

  - 18세기 후반 정조는 조선이 중국의 현대적 문학에 가까와지는것에 반대했다. 이것은 당시 서학(천주교)의 영향을 받는것을 두려워한 정조의 입장으로서 고전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 정조의 해결책은 課講과 課製, 즉 경전강의와 논술시험을 통해 초계문신들을 성리학의 이념적 전사로 양성하는것으로 정학 즉, 성리학교육을 전국적으로 강화하였다. 규장각에 젊은 학자들을 모아놓고 성리학만 연구토록 강요하였다. 할아버지 영조에 비해 학문적 자유가 쇠퇴한것이다.

  -횡성의 전 참봉 안석임(당시 74세)과 춘천의 전 주부 박사철(당시 70세)을 등용하였는데 특히 박사철을 정3품으로 회양(강원도 고성 내륙지역) 부사로 임명하였다. 

  - 중용에 대한 정조의 생각은 명말∽청초에 작성된 문집들을 금지시키고 오로지 하나의 이치인 중용의 본질이 사회를 지배하고 자신의 중용강의가 선비들에게 도서로 읽히기를 소망하였다. 북송 주돈이의 우주생성관(태극-양동, 음정-화목수금토-만물화생)에 입각한 사단칠정론(퇴계의 이기이원론, 기대승과 율곡의 이기일원론) 등 학문적 자유도 허용하지 않은 입장이었다.

  - 정조가 통치한 조선사회는 당송팔대가(당:한유, 유종원, 송: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를 중시한 사회였다.

  ※ 정조는 개혁군주로 알려져있으나 실상은 주희의 "중용장구집주"에 철저히 얽매이고 형이상학에서 부자유했으며 일종의 문화투쟁을 추구한 군주였다. 이러한 태도는 서학(천주교)이 조선에 들어오는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 박사철의 허망한 퇴직 : 1795년 4월 박사철은 회양부사에 임명된지 불과 몇달만에 벼슬에서 쫒겨났다. 함흥과 영흥의 본궁(조선왕조 선조를 모신 사당)에서 사용할 향축을 예법대로 호송하지 못한 직무수행의 무능때문이었다. 유교경전만 잘 안다고 해서 훌륭한 관료가 되지않는다는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