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풍경 3점
강릉에서 남쪽으로 발길을 돌린 단원은 삼척에 이르기 전 추암에서 '능파대(추암 촛대바위)'를 그리고, 삼척에선 관동 제일의 누각인 죽서루를 화폭에 담았다. 고려 및 조선 최고의 문인들이 시와 글로 그 비경과 역사를 노래한 죽서루에 선 단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오십천 건너 서쪽에서 강, 기암절벽, 누각, 멀리 산까지 담은 단원의 죽서루 그림은 그때 그가 느꼈던 감흥을 잘 말해주는 듯 하다.
단원이 삼척아래 울진에서 그린 그림 3점(망양정, 성류굴, 월송정)을 모사해본다.
망양정(望洋亭)은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져있다. 원래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해변 언덕에 있었는데 어느 시기인지 모르지만 잠시 현종산 기슭으로 옮겼다가 철종 때(1860년)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그 시기를 역산해보니 단원이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사군첩'을 그리기 위해 한양을 떠나기 28년 전의 일이다. 언제부터 이 망양정을 관동 8경(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와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과 월송정)의 하나로 불렀는지 궁금해진다. 바다와 떨어진 현종산 기슭에 있었으면 8경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 같다. 동해의 비경을 품어야 그 아름다움이 살아나는 것. 단원도 망양정 누각의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 화폭에 드넓은 동해 바다를 우선 담았다. 바다쪽으로 뻗은 언덕에 망양정이 우뚝 서있고,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백성들의 주거 모습도 함께 담았다. 단원은 누각의 이름 '望洋亭'이 뜻하는 그대로 큰바다를 굽어보며 큰마음으로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염원하는 바닷가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담고 싶었을 것이다. 당쟁의 상황에서 사람을 두루 살펴 정치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 조선 숙종이 이 망양정을 관동의 으뜸이라 하여 '관동제일루'란 편액을 하사한 이유도 곰곰히 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류굴(聖留窟)'은 근남면에서 왕피천을 거슬려 올라가 구산리 불영사계곡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금강송면을 지나 봉화에 이르는 아름다운 길이 있는 곳이다. 지명의 이름 성류굴(聖留窟)의 유래는 두 가지. 성불(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이 머물던 곳, 다른 하나는 임진란 당시 근처 사찰의 모든 불상들을 피난시킨 곳이란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단원이 이 성류굴을 찾기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굴을 찾은 흔적들이 있다. 2019년엔 성류굴 8광장 암벽에서 신라 진흥왕 행차 명문(眞興王擧)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진흥왕이 배를 타고 성류굴에 행차하기 위해 잔교, 즉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가교를 설치했고, 그때 50명의 수행원이 동행했다"는 것. 이외 신라 화랑, 승려들과 고려, 조선의 선비들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남긴 다수의 글자들이 발견되었다. 종유석, 석주, 석순 등 조물주가 만든 신비스런 석회암 동굴에 오랜 역사가 숨어있는 것이다. 단원은 그때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어두운 동굴속에서 그 글자들의 존재를 몰랐음이 분명하다. 알았다면 아마 동굴 내부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단원이 그린 것은 왕피천과 그 옆 거대한 기암절벽아래 조그만 동굴 입구,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월송정(越松亭)은 평해읍 월송리 소나무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다. 망양정에서 남으로 약 30Km 떨어져있다. 지금의 월송정 주변에는 해송까지 포함하여 약 3만여 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단원은 소나무 숲을 걷고, 그 짙은 솔향에 취하여 그림을 그렸을까? 단원의 그림엔 지금처럼 넓은 소나무 군락이 보이지 않는다. 월송정 누각외 다른 건물들도 보인다. 월송정 가까운 곳엔 영덕과 함께 대게가 많이 잡히는 후포 구산면이 위치하고 있는데 난 군 전역 후 영덕 불루로드 길을 걸을 때 병곡을 거쳐 이곳까지 걸었다. 조금만 더 북쪽으로 걸었음 이 월송정을 만났을텐데.. 망양정과 함께 일출 명소로도 유명한, 단원도 밟았던 이 월송정도 한번 가보아야겠다.
20240911 큰아들 생일날, Song s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