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가을 삼구회 정모.
외국 젊은이들이 한국 산의 매력에 푹 빠져 소위 K등산을 즐기려 한국을 자주 찾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계절마다 산의 모습이 다르고, 정상에 이르는 구간마다 화장실이 있으며, 가파른 암벽에 계단과 난간이 설치된 것도 신기하고, 하산하면 도토리묵에 파전, 산채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 맛집이 즐비하여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재미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산마다 사찰과 역사가 있는 북한산 비봉, 설악산 울산바위, 지리산 천왕봉이 산티아고길이나 마추픽처 보다 훨씬 산다운 산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산들을 가진 복받은 민족.
지난 봄에 우린 영주 부석사를 보고 소백산 자락길을 걸으면서 이번 가을 정모는 삼대가 적선을 쌓으면 볼 수 있다는 천왕봉을 보러 지리산 둘레길을 걷자고 했다. 갑진년 한해가 쏜살같이 지나감을 절감하는 11월을 맞이하면서 우린 약속대로 지리산 백무동으로 왔다(서울팀은 함양읍내~오도재를 넘어서 왔다). "하늘은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않는다"고 남명 조식 선생이 말한 지리산 최고봉은 외국 젊은이들이 오르게 놔두고 우린 가벼운 둘레길 한 구간을 걸으며 계곡 물소리와 단풍을 즐기려 온 것이다.
첫날 오후, 서울과 고향에서 시간 맞추어 도착한 우린 수명이를 따라 지리 주능선에 있는 모든 봉우리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금대산(847m)에 오른다. 지리산 둘레길 시범마을인 매동마을~등구재 구간이 아닌 금대암에서 바로 정상까지 오르는 길을 택한다. 600여 년 수명(壽命)의 키 큰 전나무가 유명한 유서깊은 금대암은 신라 무열왕 3년(656년)에 행우조사가 창건했고, 도선국사, 서산대사가 수도했으며 김일손, 정여창이 이곳을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길로 접어들기 전 사찰 뒤 큰 암벽과 너럭바위가 예사롭지 않다. 낙엽 무성한 가파른 산죽길을 따라 1시간 정도 걸어 정상에 서니 말그대로 지리산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좌에서 우로 하봉~중봉~천왕봉~제석봉~장터목~연화봉~촛대봉~세석산장~영신봉~칠선봉~형제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모든 봉우리들이 선명한데 천왕봉(1915m)만 구름속에 갇혀있다. 우리 모두 삼대가 덕을 쌓지 않은 모양이다. 오늘따라 무척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정상 바위에 올라 단체 사진을 담았다.
둘째 날, 여주인장이 정성스럽게 요리한 맛있는 아침밥(황태국에 고사리, 콩잎, 참나물, 우엉, 무우말랭이, 고추잎, 묵은 김치 등 서울에선 먹기 힘든 토속 반찬)을 먹었다. 집에서 힘 떨어진 우린 아내로부터 이런 아침밥을 얻어먹기 힘들다는 푸념과 함께 이 백무동 맛집에 온 것은 행운이라며..
칠선계곡, 뱀사골과 함께 지리산 3대계곡 중 하나인 한신계곡을 걷는다.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물따라, 단풍잎따라 느긋하게 걷는다. 백무동 이름 유래에 대해선 옛적부터 백 명이 넘는 무당이 많이 살았다는 설(百巫)과 흰 안개가 아름다운 계곡(白霧)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둘 다 틀리고 '비단 계곡물이 춤추는 백무(帛舞)'인 것 같다. 그만큼 흰빛 물살이 아름다운 계곡이다. 단풍은 올라갈수록 다른 색이다. 계곡에 들어서기 전 입구의 단풍이 제일 붉었다. 물과 단풍, 물위에 떠다니는 낙엽, 이끼 푸른 바위가 어우러진 계곡 길을 걸으면서 서울둘레길을 걷는 친구가 말한다. "차원이 다른 맑은 공기, 깊은 느낌을 주는 비경이다. 서울둘레길을 포기하고 지리산둘레길을 걷자"고. '첫나들이 폭포'에 이르러 단체 사진과 함께 떠나가는 늦가을을 모조리 담는다. 노년에 접어든 우린 새로운 인생 무대에 서서 첫나들이를 나서고 싶은 마음들이다. 더 올라 '가내소 폭포'에 이르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씌어져있다. "신라 때 이곳에서 도를 닦던 승려가 도통했다는 자신감에서 계곡사이에 실(絲)을 걸쳐놓고 눈을 감고 그 위를 걷다가 지리산 여신(女神)의 방해로 그만 물에 빠졌다. 승려는 자신의 도력 한계를 느끼고 '난 이제 그만 가네'하면서 세속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어떤 일이든 자만, 교만하면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 '가네소 폭포'에서도 단체 사진을 담았다. 여기 저기 99개 계곡이 산재해있는 지리산은 화려하진 않지만 깊고, 오묘한 세계다. 수명인 산을 여자에 비유하여 "설악산은 빼어난 미모에 남자들이 선뜻 빠져들지만 갈수록 사랑이 식어가는 여자, 지리산은 처음엔 그저 그러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은근하고 포근한 사랑이 찾아드는 여자"라고 말한다. 과연 전국의 명산 모두를 수없이 밟은 산사나이의 정직한 소감이다. 느긋하게 늦가을을 즐기다보니 낙엽이 비를 뿌리듯 바람에 후두둑 떨어지더니 하늘이 어두워지고 빗방울을 뿌린다. 왔던 길을 되돌린다. 이제 내려가서 백숙 점심을 먹고 못다한 우리들 이야기를 나누자며 백무동으로 하산한다.
솜씨 좋은 여주인장이 내놓은 백숙을 맛있게 먹고 바로옆 커피숍에서 이번 정모를 마무리한다. 6개월만에 다시 만나 1박 잠자리를 함께한 것이 의미가 있다. 높은 산을 직접 오르지않고 금대산에서 눈으로 지리산 모든 봉우리들을 보고, 한신계곡의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며 귀 청소를 하고, 늦단풍을 구경하면서 눈을 맑게한 이번 가을 정모 참 좋았다. 어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재엽회장이 2주 후에 예정된 홍조 장녀 결혼을 미리 축하해주자는 건배사가 참 좋았다. 병일이 차를 타고 편하게 이곳에 온 난 편하게 집으로 간다. 상경길 '지리산 조망공원'에 씌어진 면암 최익현의 시 '천왕봉'을 읽어본다.
"하늘과 땅과 풀이 그 어느 해에 처음 열려서 두류산을 준비하여 저 하늘을 떠받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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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길을 찾고 있는데 어디 다른 길이 있을손가.
발원하는 데서부터 빗물이 떠나가게 되었으리라."
우리 모두 건강을 잘 챙기면서 참 길을 꾸준히 걸어갔음 좋겠다. 갑진년을 잘 마무리하고 시간 가능한 친구들 서울 홍조 따님 결혼식장에서 다시 봅시다.
굿바이 2024 가을 백무동 정모!
20241104, Song s y
(영상)
https://youtu.be/r4rxrqGFZew?si=70sjQAqKbx5dnR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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